베네수엘라 붕괴의 가장 깊은 곳,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 국가의 운명은 경제 지표가 아닌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믿음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한때 남미에서 가장 낙관적이던 사회가 불신과 냉소에 빠져
결국 기존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자는 급진적인 포퓰리즘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한 사회의 집단 심리가 어떻게 재편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심리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탐구입니다.
1부: 믿음은 어떻게 경제를 만드는가? – 이성의 함정
우리는 종종 사람들의 정치적, 경제적 신념을 비합리적인 감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 같은 행동경제학자들은
많은 경우 사람들의 믿음이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지극히 합리적인 적응의 결과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흥미로운 사고 실험을 제시했습니다.
여기 두 명의 농부가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농부 A는 비가 예측 가능하게 내리고 토양이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일하고 좋은 씨앗을 뿌리면 거의 확실하게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세계관에서 성공은 노력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그는 높은 세금으로 게으른 사람을 돕는 것보다 낮은 세율과 개인의 자유를 선호하는 우파적 신념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농부 B는 예측 불가능한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닥치는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갑작스러운 홍수 한 번이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의 세계관에서 성공은 순전히 운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개인의 노력보다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운에 대비해
모두가 함께 세금을 많이 내고 강력한 사회 안전망을 만들어 위험을 공유하는 좌파적 신념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두 농부 중 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각자가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지극히 합리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이 비유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1970년대 이후 베네수엘라의 땅은 걷잡을 수 없는 유가 변동,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극심한 경기 침체라는
예측 불가능한 홍수와 가뭄이 끊임없이 덮치는 땅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급격한 변화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노력과 성공에 대한 믿음을 뿌리부터 뒤흔들기 시작했습니다.
2부: 믿음을 파괴한 네 명의 기수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들이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집단 심리를
우파적 낙관주의에서 좌파적 냉소주의로 이동시켰을까요?
우리는 네 가지 결정적인 요인을 ‘믿음을 파괴한 네 명의 기수’로 부를 수 있습니다.
제1기수: 거시경제의 광기 (Macroeconomic Volatility)
첫 번째 기수는 바로 거시경제의 극심한 불안정성입니다.
특히 살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과 반복되는 경기 침체의 경험은 평범한 사람들의 경제 관념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20년간 힘들게 모은 평생의 저축이 불과 6개월 만에 휴지 조각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한다면 어떨까요?
당신의 월급이 두 배로 올랐지만 빵 한 조각의 가격은 세 배로 오르는 현실을 매일 마주한다면 어떨까요?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연간 수만, 수십만 퍼센트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바로 이러한 현실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미래를 위해 저축하거나 꾸준히 기술을 연마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됩니다.
오히려 한정된 자원을 빨리 써버리거나 혼란 속에서 운 좋게 한몫 잡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 됩니다.
이처럼 극심한 경제적 불안정성은, 개인의 경제적 운명이 자신의 통제 가능한 노력이 아니라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뼈아픈 교훈을 사회 전체에 각인시킵니다.
월드 밸류 서베이 같은 세계적인 여론조사 데이터는 역사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은 국가일수록
국민들이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고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남을 증명합니다.
제2기수: 석유라는 이름의 로또 (The Oil Lottery)
두 번째 기수는 베네수엘라의 정체성 그 자체인 석유입니다.
한 국가의 부가 수많은 국민들이 흘리는 땀의 집합이 아니라
그저 땅속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것일 때 사람들은 부의 본질을 다르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은 성실하게 일해서 번 월급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당첨된 로또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불로소득의 심리는 사회 전체에 지대 추구 문화를 만연시킵니다.
지대 추구란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부를 차지하기 위해 자원을 낭비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유능한 기업가는 공장을 짓는 대신 정부 관료와의 인맥을 쌓는 데 시간을 보내고
일반 국민들은 정부의 보조금이나 배급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는 “모든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믿음을 낳습니다.
국가는 국민들의 삶을 책임지는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라
거대한 로또 당첨금을 나누어주는 시혜자로 인식됩니다.
이러한 심리 구조는 노력과 혁신보다는 운과 배급을 중시하는 좌파적 이념이 뿌리내리기에 최적의 토양이 됩니다.
제3기수: 부패라는 이름의 그림자 (The Shadow of Corruption)
세 번째 기수는 사회 전체의 신뢰를 좀먹는 부패입니다.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는 그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새롭게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은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한 발명가가 아니라
정치권과 결탁하여 특혜를 받은 정치 브로커들입니다.
특히 차베스 정부 시절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의 차이를 이용해 막대한 부를 챙긴
‘볼리부르주아’의 등장은 이러한 인식을 극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부가 더 이상 재능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아니라
도둑질의 결과물이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유 시장은 결국 힘 있고 연줄 있는 놈들만 배 불리는 사기꾼들의 놀이터일 뿐”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부패는 단순히 경제적 비효율을 넘어,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민중의 증오를 키우고, 그 증오를 먹고사는 포퓰리즘 정치가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합니다.
제4기수: 범죄라는 이름의 공포 (The Reign of Crime)
마지막 기수는 가장 원초적인 공포, 바로 범죄입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살인, 강도, 납치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첫째,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이유, 즉 시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사회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정부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공포는 기존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는 강력한 스트롱맨의 등장을 갈망하게 만듭니다.
둘째, 만연한 범죄는 강력한 경제적 신호를 보냅니다.
그것은 사회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한 달 내내 힘들게 일해서 박봉을 받는 것보다
총을 들고 한탕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경제적 선택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범죄의 창궐은 공식 경제 시스템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노력과 보상에 대한 마지막 믿음마저 파괴합니다.
3부: 현실의 흐릿한 경계 – 인식이 진실을 대체할 때
이 네 명의 기수가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더 무섭고 교활한 현상, 즉 인식이 현실을 대체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 연구는 사람들의 부패에 대한 인식이 실제 부패 경험보다
오히려 범죄에 대한 인식과 훨씬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수십 년간의 혼돈과 불안, 그리고 정치적 선동 속에서 사람들의 현실 판단 능력이 흐릿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때 사람들은 더 이상 개별적인 사실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고
막연한 분위기나 감정에 의존하게 됩니다.
범죄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면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도 사회 전체가 부패했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의 붕괴’는, 사실에 기반한 합리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대중의 집단적인 분노와 피해의식, 그리고 불안감을 교묘하게 조작하고
증폭시키는 포퓰리스트 선동가들에게 최적의 활동 무대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적을 규정하고 감정을 자극하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을 대중이 믿게 만듭니다.
결론: 포퓰리즘을 위해 완벽하게 준비된 사회
1998년 휴고 차베스가 등장했을 때 베네수엘라의 집단 심리는 이미 완전히 재편되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의 경제적 불안정성, 석유가 주는 불로소득의 심리, 만연한 부패와 범죄의 공포는
노력, 개인의 책임, 시장의 공정성과 같은 가치에 대한 믿음을 체계적으로 파괴했습니다.
국민들은 단지 가난하고 분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자신의 모든 문제가 외부의 불공정한 힘 때문에 발생했으며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믿도록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휴고 차베스는 이러한 믿음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믿음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간파한, 정치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있던 바로 그 분노와 열망에 강력한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으로 결집시켰을 뿐입니다. 그의 등장은 필연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네수엘라 경제의 신체와 정신이 어떻게 모두 붕괴했는지 그 완전한 해부도를 손에 넣었습니다.
다음 11편에서는 지난 10편에 걸친 기나긴 분석을 종합하여
“그래서, 베네수엘라는 왜 붕괴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을 내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