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밥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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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흐름을 바꾼 거대한 사건 앞에는 종종 시대의 광기를 거스르는 외로운 목소리가 존재합니다.
1920년대, ‘광란의 20년대’라 불리는 끝없는 낙관과 투기 열풍 속에서 모두가 영원한 번영을 꿈꿀 때,
홀로 “추락은 반드시 온다”고 외쳤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로저 밥슨.
월스트리트의 예언가이자, 교육자이며, 괴짜 뉴턴주의 경제학자였습니다.

1. 뉴턴의 법칙에서 경제를 읽다: 밥슨 차트

로저 밥슨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공학을 공부한 독특한 이력의 경제학자였습니다.
그는 경제를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보았고, 그 움직임 속에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예측은 단순한 감이 아니라, 뉴턴의 제3법칙인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경제에 적용한 독특한 분석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즉, 모든 경제 활동의 비정상적인 ‘작용(상승)’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크기의 ‘반작용(하락)’을 불러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그는 ‘밥슨 차트(Babson Chart)’라는 독자적인 분석 도구를 개발했습니다.
이 차트는 정상적인 경제 성장 곡선을 그리고, 실제 주가 지수가 이 곡선에서 얼마나 벗어나 과열되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1920년대 후반, 주가 지수가 정상 궤도를 한참 벗어나 위험천만한 ‘과열 영역’에 진입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를 외칠 수 있었던 이론적 근거였습니다.

2. 광란의 시대에 울린 경고: “추락은 반드시 온다”

1929년 9월 5일, 로저 밥슨은 연례 비즈니스 콘퍼런스 연설을 위해 연단에 섰습니다.
당시 주식 시장은 사상 최고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그 누구도 파티가 끝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역사에 남을 예언을 합니다.
“나는 지금의 낙관론을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추락이 올 것이고, 그것은 끔찍할 것입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부수고 말 것입니다.”

이 발언 직후, 시장은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주식 시장은 약 3% 급락했고, 사람들은 이를 ‘밥슨 브레이크(Babson Break)’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은 그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를 시대에 뒤떨어진 비관론자라며 비웃었고, 시장은 곧바로 회복하여 다시 상승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정확히 7주 뒤, 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을 시작으로 주식 시장은 대폭락했고, 세계는 대공황이라는 기나긴 암흑기로 접어들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투자자들은 그제야 밥슨의 경고를 떠올렸고, 그는 ‘세일럼의 현인’이자 ‘월스트리트의 예언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3. 예측을 넘어 교육으로: 밥슨 대학의 설립

로저 밥슨은 단순히 시장을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론에만 치중하는 기존의 경영 교육에 한계를 느끼고, 학생들이 실제 비즈니스 세계에서 필요한 실무 능력을 갖추길 바랐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1919년, 자신의 이름을 딴 ‘밥슨 연구소(Babson Institute)’를 설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밥슨 칼리지(Babson College)의 시작입니다.

밥슨 칼리지는 학생들이 실제 사업을 구상하고, 공장을 방문하며, 비즈니스 리더들과 직접 소통하는 현장 중심의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교육 철학은 단순한 학위가 아닌, ‘실제로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후 플로리다에 웨버 국제대학교(Webber International University)를, 캔자스에 유토피아 칼리지(Utopia College)를 추가로 설립하며 자신의 교육 이념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4. 알려지지 않은 도전: 대통령 선거 출마

로저 밥슨의 독특한 이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깊은 신앙심을 가진 인물로서, 사회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그는 알코올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이 크다고 믿었고, 금주법을 강력하게 지지했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금주당(Prohibition Party) 후보로 직접 출마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물론 선거 결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밥슨의 득표율은 미미했습니다.
하지만 이 도전은 그가 단순히 돈과 경제에만 매몰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원칙주의자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화입니다.

5. 엇갈린 평가와 유산

로저 밥슨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엇갈립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뉴턴의 법칙이라는 자신만의 확고한 이론으로 대공황을 정확히 예측한 천재적인 경제학자로 칭송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그가 수년간 계속해서 시장 붕괴를 경고해왔으며, 1929년의 예측은 수많은 경고 중 하나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깨진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와 같은 경우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영원한 상승은 없다’는 시장의 기본적인 진리를 누구보다 먼저 꿰뚫어 보았고, 모두가 탐욕에 취해있을 때 용기 있게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한 시대의 광기를 목격한 증인이자, 예측을 넘어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려 했던 선구자였습니다.
월스트리트의 예언가이자 교육자, 그리고 신념을 위해 나섰던 괴짜 정치인. 로저 밥슨은 자본주의 역사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참고 : https://en.wikipedia.org/wiki/Roger_Bab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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