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의 낡은 규칙이 무너지고
돈의 흐름이 영원히 바뀌어버린 격동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카우보이 자본주의라 부릅니다.
안정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광활한 금융의 평원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며 부와 권력을 쟁취했던 무법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 새로운 시대의 서막
금본위제의 마지막 그림자
1971년 8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선언은 단순한 경제 정책 발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30년간 세계 경제의 굳건한 닻 역할을 해왔던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사망 선고였습니다.
이 체제의 핵심은 금 태환 달러 즉 미국 달러를 가져가면
언제든 정해진 양의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약속에 있었습니다.
이 약속을 기반으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 통화의 가치를 미국 달러에 고정시켰죠.
이는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안정적인 궤도를 도는 것과 같은 질서였습니다.
금이라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존재했기에 환율은 안정적이었고
국제 금융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이 질서는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막대한 전쟁 비용과 위대한 사회 건설을 위한 복지 지출로 인해
미국 정부는 천문학적인 달러를 찍어냈고 이는 전 세계로 흘러나갔습니다.
어느새 시중에 풀린 달러의 총량은 미국이 보유한 금의 양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어버린 금 태환 제도를 포기한 것은
몰락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향한 필연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새로운 질서의 혼돈
금이라는 족쇄가 풀린 순간 돈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신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돈의 가치는 그 어떤 실물 자산에도 고정되지 않은 채
오로지 시장 참여자들의 믿음과 기대 그리고 각국 경제의 펀더멘털에 따라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사라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항구를 떠난 배들이 망망대해에서
각자의 나침반과 항해술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 거대한 불확실성의 바다야말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는 대담한 모험가
즉 금융의 카우보이들이 등장할 완벽한 무대였습니다.
이전 시대의 금융가들이 정해진 항로를 안전하게 운항하는 상선 선장이었다면
새로운 시대의 금융가들은 변화무쌍한 파도 속에서 보물섬을 찾아 나서는 해적선 선장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혼돈 속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새로운 부의 지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은 바로 이 위대한 금융 모험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포성이었습니다.

금융의 족쇄가 풀리다: 변동환율제의 도래
환율, 거대한 투기의 대상이 되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는 곧 변동 환율제라는 미지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금융 시장에 환율 변동 리스크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 시켰습니다.
과거에는 정부가 정해놓은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움직이던 환율이
이제는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국가의 경제성장률 금리 정책 정치 상황 무역수지 등
온갖 정보가 통화 가치에 즉각적으로 반영되었고
이는 환율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투자 혹은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였던 곳이 갑자기 서핑을 즐길 수 있는 거친 파도의 바다로 변한 것과 같았습니다.
노련한 서퍼들은 이 파도의 흐름을 읽고 파도에 올라타
짜릿한 스릴과 엄청난 부를 거머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조지 소로스와 같은 인물들이 바로 이 새로운 바다에서 탄생한 전설적인 서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경제 펀더멘털과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며
때로는 한 나라의 중앙은행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리스크와 기회의 공존
변동성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그 변동성을 관리하려는 수요를 낳았습니다.
국경을 넘어 상품을 수출하고 원자재를 수입하는 기업들은
예측 불가능한 환율 변동 때문에 안정적인 사업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졌습니다.
오늘 1달러의 이익을 남기고 수출한 상품이
내일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손실로 바뀔 수도 있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리스크를 피하고 싶다는 기업들의 절박한 필요는
파생상품이라는 혁신적인 금융 도구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미래의 특정 시점에 정해진 가격으로 통화를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사고파는
통화 선물이나 통화 옵션 시장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리스크를 관리하는 보험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리스크 자체에 베팅하여
더 큰 수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에게는 레버리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터를 제공했습니다.
변동환율제의 도래는 이처럼 리스크 관리와 리스크 투기라는 양면성을 지닌 채
현대 금융 시장의 복잡성과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동력이 되었습니다.

‘카우보이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규칙보다 본능을 따르는 개척자들
카우보이 자본주의는 안정과 질서 대신 자유와 경쟁을 선택한
198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을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이 시대의 금융가들은 마치 서부 개척시대의 카우보이처럼
기존의 규칙과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금융의 영토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들에게 월스트리트는 더 이상 점잖은 신사들의 사교 클럽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광활한 황야이자 대담한 자만이 살아남는 무법지대였습니다.
과거 월스트리트를 지배했던 것은 아이비리그 출신의 번듯한 정장을 입은 은행가들이었다면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들은 출신 배경보다는 시장을 꿰뚫는 동물적인 감각과
승리에 대한 집착으로 무장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낡은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보다 시장의 최전선에서 체득한 실전 경험을 더 신뢰했고
법과 규제는 지켜야 할 원칙이라기보다는 목표 달성을 위해 넘어서야 할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금융 혁신을 가속화하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는 토양이 되기도 했습니다.
안정보다 리스크를 사랑한 시대
카우보이 자본주의의 또 다른 핵심 특징은 리스크에 대한 태도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이전 세대의 금융가들이 리스크를 관리하고 회피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면
이 시대의 금융가들은 리스크를 적극적으로 창출하고 거래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들에게 리스크는 위험이 아니라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변동성이 클수록 예측이 어려울수록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죠.
그들은 마치 성난 황소의 등 위에서 8초를 버티는 로데오 챔피언처럼
시장의 아찔한 변동성 위에서 부와 명예를 걸고 위험한 게임을 즐겼습니다.
이러한 리스크에 대한 숭배는 월스트리트의 문화를 바꾸었습니다.
신중함과 안정성은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었고
대담함과 공격성이 새로운 미덕으로 떠올랐습니다.
이처럼 카우보이 자본주의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뒤엎으며
월스트리트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약육강식의 세계로 재편했습니다.
월스트리트의 새로운 주인공, 트레이더의 부상
책상 위의 이론가에서 전쟁터의 전사로
카우보이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월스트리트의 권력은
전통적인 투자 은행가들의 손에서 시장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트레이더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과거의 금융가들이 기업의 내재 가치를 분석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 결정을 내리는 학자에 가까웠다면
트레이더들은 매 순간 변화하는 시장의 파도를 타며
단기적인 시세 차익을 노리는 서퍼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업의 5년 10년 뒤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오늘 이번 주 이번 달의 주가 움직임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였죠.
그들은 복잡한 재무제표 대신 컴퓨터 화면에 실시간으로 깜빡이는 시세 그래프를 믿었고
장기적인 분석보다는 시장의 미세한 심리 변화를 포착하는 동물적인 감각에 의존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월스트리트의 의사결정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였고
시장 전체를 훨씬 더 단기적이고 변동성이 큰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성과가 모든 것을 말하는 문화
트레이더들의 세계는 철저한 능력주의와 성과주의가 지배했습니다.
출신 학교나 가문 인맥은 더 이상 성공의 보증수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수익률만이 그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척도였죠.
이러한 문화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재능 있는 인재들을 월스트리트로 끌어들이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단기 실적에 대한 압박은
동료를 경쟁자로만 여기고 장기적인 리스크를 외면하는 위험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막대한 보너스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윤리적 기준은 종종 무시되었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트레이더의 부상은 월스트리트가 자본을 형성하고 배분하는 전통적인 기능을 넘어
부의 재분배를 위한 거대한 게임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케인즈 시대의 종언과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의 부활
‘큰 정부’의 퇴장
1980년대 카우보이 자본주의의 등장은 단순히 금융 시장의 기술적 문화적 변화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 근본에는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세계를 지배해 온 거시 경제 사상의 거대한 지각 변동이 있었습니다.
대공황의 잿더미 속에서 탄생하여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옹호했던 케인즈주의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전례 없는 현상 앞에서 힘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이 기묘한 질병 앞에서
케인즈주의 처방은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 시장의 효율성을 해치고 관료주의만 키웠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지적 공백을 뚫고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이 주창하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그들은 규제와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경제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했습니다.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바람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곧 정치의 영역으로 이어졌습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신자유주의라는 깃발 아래 강력한 규제 완화 민영화 감세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특히 금융 부문에 가해졌던 수많은 족쇄들이 풀려나갔습니다.
금융 기관들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영역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의 이동은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정부의 역할은 시장의 심판관에서 시장의 조력자로 축소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대전환은 월스트리트의 카우보이들이
마음껏 질주할 수 있는 광활한 평원을 열어주었습니다.
시장은 항상 옳다는 새로운 믿음 아래 금융 혁신은 그 자체로 찬양받았고
투기적 행위조차 시장의 활력을 높이는 긍정적인 활동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파생상품 혁명: 리스크는 어떻게 상품이 되었나
보이지 않는 것을 거래하다
자유와 변동성의 시대는 금융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발명품인
파생상품의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파생상품은 주식이나 채권처럼 실체가 있는 자산이 아니라
미래의 가격 금리 환율 변동과 같은 가능성 즉 리스크 그 자체를
거래 대상으로 삼는 금융 계약입니다.
이는 마치 미래의 날씨에 대한 권리를 사고파는 것과 같이
금융의 개념을 현실 세계의 제약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영역으로 무한히 확장시킨 혁명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금융이 기업의 소유권을 나누는 것이었다면 이제 금융은 미래의 불확실성 자체를 나누고 거래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의 확장은 금융 시장의 규모와 복잡성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동시에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위험을 시스템 내부에 심어놓았습니다.
헷징과 투기의 양날의 검
파생상품의 본래 목적은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한 헷징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농부는 미래의 곡물 가격 하락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선물 계약을 팔고
항공사는 미래의 유가 상승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선물 계약을 삽니다.
이처럼 파생상품은 실물 경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는 반드시 그 리스크를 기꺼이 떠안는 존재가 필요하며 그들이 바로 투기꾼입니다.
투기꾼들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대가로 높은 수익을 추구하며 시장에 필수적인 유동성을 공급합니다.
문제는 헷징 수요보다 투기 수요가 압도적으로 커지면서 발생합니다.
시장은 실물 경제의 위험을 관리하는 장에서
리스크 자체를 증폭시켜 거래하는 거대한 카지노로 변질될 위험을 안게 된 것입니다.
1980년대 이후 파생상품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은 바로 이 투기적 측면이 극대화된 결과였습니다.
차입매수(LBO)의 탄생: 기업을 사냥하는 새로운 방식
빚으로 기업을 삼키다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풍경을 바꾼 또 하나의 혁신은 차입매수
즉 LBO(Leveraged Buyout)였습니다.
이는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과 미래 현금흐름을 담보로
막대한 빚을 일으켜 그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금융 자본이 산업 자본을 지배하는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사건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소규모 자본으로 거대 기업을 사냥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지렛대를 이용해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LBO 전문가들은 부채라는 강력한 지렛대를 활용하여
미국 산업계의 거인들을 차례로 들어 올려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이 기법의 등장은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완전히 뒤엎는 혁명이었으며
월스트리트의 자본가들을 단순한 투자자를 넘어 기업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로 만들었습니다.
안정적인 현금흐름의 재발견
LBO의 주된 사냥감이 된 것은 기술 혁신을 이끄는 화려한 성장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담배 식료품 생활용품처럼 사업 자체는 지루하지만
경기 변동에 관계없이 꾸준하고 예측 가능한 현금흐름을 창출하는 안정적인 기업들이었습니다.
기업 사냥꾼들은 이러한 기업들이 마치 잠자고 있는 보물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기업들을 빚을 내어 인수한 뒤 자산을 매각하고 직원을 해고하는 등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단기간에 현금 창출 능력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짜낸 현금으로 인수에 사용했던 빚을 갚아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이나 직원들의 삶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부채를 상환하고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LBO는 자본의 효율성을 높였다는 평가와 함께
기업을 단기적인 이익 창출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게 되었습니다.
마이클 밀켄, 정크본드의 왕이 나타나다
월스트리트의 이단아
1980년대 카우보이 자본주의의 모든 특징을 한 몸에 구현한 인물이 바로 마이클 밀켄입니다.
그는 월스트리트의 전통적인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이단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동부의 명문가 출신들이 즐비한 월스트리트에서
그는 캘리포니아의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화려한 사교술이나 인맥 대신 오직 숫자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과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고야 마는 광적인 집념으로 승부했습니다.
그는 월스트리트의 중심인 맨해튼을 떠나 서부의 베벌리힐스에 자신만의 금융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 기존 금융 질서에 대한 그의 반감과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야망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낡은 규칙에 얽매이기를 거부했고 월스트리트의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돈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정크본드, 그의 손에서 무기가 되다
밀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자 가장 논쟁적인 발명은 바로 정크본드 시장의 창조입니다.
정크본드는 신용등급이 낮아 투자 부적격 판정을 받은 기업들이 발행하는
고위험 고수익 채권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월스트리트에서 정크본드는 말 그대로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상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밀켄은 이 쓰레기 더미 속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정크본드들이 제공하는 높은 이자율이
개별 기업의 부도 위험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통계적으로 입증해냈습니다.
그는 버려졌던 금융 상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고
그것을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무기로 재탄생시켰습니다.
그의 손에서 정크본드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기업을 일으키고 거대 기업을 사냥하며
월스트리트의 권력 지도를 바꾸는 연금술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정크본드’의 재발견: 쓰레기에서 황금을 찾다
버려진 채권에 담긴 가치
마이클 밀켄의 혁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장에서 버려지고 잊혔던 것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월스트리트의 주류 투자자들은 신용평가기관이 매긴 등급을 맹신했습니다.
투자 적격 등급을 받지 못한 채권은 그 내용과 상관없이 위험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죠.
하지만 밀켄은 이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는 신용등급이라는 껍데기 대신 개별 기업의 실제 현금 창출 능력과 성장 잠재력이라는 알맹이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방대한 역사적 데이터를 분석하여 투자 부적격 등급 채권들의 실제 부도율이
시장이 생각하는 것만큼 높지 않으며 그들이 제공하는 높은 이자율이
부도 위험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마치 모두가 돌멩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정크라는 이름표 뒤에 숨겨진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낸 것입니다.
새로운 기업을 위한 자금 조달 창구
정크본드의 재발견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졌지만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수많은 신생 기업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입니다.
1980년대 초 케이블 TV 이동통신 바이오 기술과 같은 신산업 분야의 기업들은
전통적인 은행이나 보수적인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의 사업 모델은 너무나 생소했고 당장의 담보나 수익을 증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마이클 밀켄의 정크본드가 구원투수로 등장했습니다.
밀켄은 이들 기업의 미래 성장 가능성에 과감하게 베팅했고
정크본드 발행을 통해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성장 자금을 공급했습니다.
CNN MCI McCaw Cellular와 같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혁신 기업들이
바로 밀켄의 정크본드를 자양분 삼아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정크본드는 미국 산업 지형을 바꾼 새로운 자본의 동맥 역할을 했습니다.
드렉셀 번햄 램버트: 밀켄의 제국
베벌리힐스에 세워진 왕국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모든 길은 뉴욕이 아닌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로 통했습니다.
그곳에는 마이클 밀켄이 이끄는 투자은행 드렉셀 번햄 램버트의 정크본드 부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부의 전통적인 금융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밀켄의 도전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동부의 금융가들이 잠든 새벽 밀켄의 X자 모양 책상에서는
이미 전 세계 금융 시장을 움직이는 결정들이 내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화기 몇 대와 컴퓨터 스크린만으로 뉴욕의 거대한 투자은행들을 압도했고
월스트리트의 권력 중심을 서부로 옮겨왔습니다.
드렉셀은 단순한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밀켄이라는 절대 군주가 통치하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금융 제국이었습니다.
정보와 자본의 독점
드렉셀의 힘은 정크본드 시장의 발행과 유통을 사실상 독점했다는 데서 나왔습니다.
자금이 필요한 모든 기업 그리고 고수익을 노리는 모든 투자자들이 드렉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는 밀켄에게 시장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쥘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누가 돈을 필요로 하는지 누가 누구를 노리는지
시장의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누구보다 먼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독점적인 정보와 자본을 무기로 시장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기업들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그의 자금 지원 여부에 따라 산업의 지형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시장 참여자를 넘어 시장 그 자체를 설계하고 지배하는 설계자이자 지배자였습니다.
드렉셀 제국은 밀켄의 천재성과 정크본드 시장의 독점력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가장 강력한 권력이었습니다.

적대적 M&A의 시대: 기업 사냥꾼들의 포식
그린메일, 위협을 통한 갈취
마이클 밀켄의 정크본드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기업 사냥꾼들은 존재했습니다.
그들이 초기에 사용했던 주된 무기는 그린메일(Greenmail)이었습니다.
이는 특정 기업의 주식을 조용히 사들여 경영권을 위협할 만한 지분을 확보한 뒤
기존 경영진에게 “우리의 경영 참여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가 사들인 주식을 시장 가격보다 훨씬 비싼 값에 되사 가라”고 협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인질범이 몸값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많은 기업 경영자들은 회사를 지키기 위해 이들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업의 돈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셈이었죠.
그린메일은 기업 사냥꾼들에게 큰돈을 안겨주었지만
기업 전체를 인수하기보다는 경영진을 위협하여 단기적인 이익을 취하는
비교적 소규모의 약탈에 가까웠습니다.
정크본드를 이용한 전면전
하지만 마이클 밀켄과 드렉셀이 정크본드라는 막강한 화력을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M&A의 양상은 소규모 약탈전에서 기업 전체를 집어삼키는 대규모 전면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기업 사냥꾼들은 더 이상 경영진을 협박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밀켄이 조달해 준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바탕으로
자신들보다 몇 배나 더 큰 규모의 거대 기업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인수 제안을 던졌습니다.
월스트리트는 거대 정유회사 항공사 식품회사 등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연이어 사냥의 대상이 되는 거대한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십 년간 안정적인 경영을 이어오던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미국 산업계 전체는 전례 없는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정크본드는 이 거대한 전쟁을 가능하게 한 압도적인 화력이었습니다.

LBO와 정크본드의 결합이 가져온 파괴적 혁신
규모의 한계를 넘어서다
차입매수(LBO)와 정크본드의 결합이 가져온 가장 혁명적인 변화는
기업 인수의 규모의 한계를 무너뜨렸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기업을 인수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거대한 자기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밀켄은 이 공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인수 대상 기업이 미래에 벌어들일 현금 그리고 인수한 뒤
자산을 팔아 확보할 수 있는 현금을 담보로 정크본드를 발행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의 자본으로 바꾸는 금융의 연금술과 같았습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자본이 부족했던 기업 사냥꾼들도 거대 기업을 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작은 다윗이 부채라는 강력한 물맷돌을 손에 쥐고
거인 골리앗에게 도전하는 것과 같은 구도를 만들어냈고
월스트리트의 힘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속도와 효율성의 극대화
이 새로운 금융 기법은 기업 인수합병의 속도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였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수많은 은행과 투자자들을 설득하며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렸을 대규모 자금 조달이
밀켄의 손을 거치면 단 며칠 만에 완료되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자신만의 강력한 정크본드 투자자 네트워크를 통해
마치 군사 작전을 수행하듯 신속하고 은밀하게 자금을 모았습니다.
이러한 압도적인 속도는 인수 대상 기업이 제대로 된 방어 전략을 세울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기업 사냥꾼들은 드렉셀이 제공하는 자금 조달 확약서 한 장만으로 적대적 인수를 밀어붙였고
월스트리트는 그야말로 속도전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LBO와 정크본드의 결합은 자본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습니다.
“탐욕은 선하다”: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정신
새로운 영웅의 탄생
1987년 개봉한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주인공 고든 게코가 외친
“탐욕은 선하고 유용하며 명료하고 본질을 꿰뚫고 모든 창조적 정신의 정수다”라는 대사는
1980년대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포착했습니다.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공동체와 안정을 중시했던 사회 분위기는
1980년대에 들어 개인의 성공과 부의 축적을 찬양하는 문화로 급격하게 전환되었습니다.
특히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은 이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이자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마이클 밀켄 이반 보스키 칼 아이칸과 같은 인물들은
낡은 산업 시대의 거인들을 쓰러뜨리는 현대판 기사와 같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의 성공 스토리는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미화되었고
명문대 졸업생들은 실리콘밸리가 아닌 월스트리트로 향했습니다.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지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으로 여겨졌고
막대한 부는 그들의 비범한 능력을 증명하는 훈장이 되었습니다.
부의 과시와 경쟁
새롭게 등장한 금융 영웅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과시하며 대중의 선망을 즐겼습니다.
수백만 달러를 들여 미술품을 사들이고 자선 파티를 열고
초호화 요트와 전용기를 소유하는 것은 그들의 성공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시적 소비는 또 다른 성공에 대한 열망을 자극했고
월스트리트는 누가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화려하게 쓰는지를 경쟁하는
무한 경쟁의 장이 되었습니다.
여피(Yuppie)로 불리는 젊은 도시 전문직들은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하며 모방했고
사회 전체가 부의 축적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탐욕은 선하다는 구호는 더 이상 은밀한 욕망이 아니라 시대가 공유하는 당당한 신념이 되었습니다.
부의 과시와 새로운 사교계의 등장
자선 파티와 미술품 경매
1980년대 월스트리트가 창출한 천문학적인 부는 뉴욕의 사교 지도를 재편했습니다.
과거 록펠러나 밴더빌트 가문처럼 대대로 부와 명예를 이어온 구귀족(Old Money)의 시대가 저물고
금융을 통해 단기간에 벼락부자가 된 신흥 부호(New Money)들이
사교계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주된 무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링컨 센터에서 열리는 대규모 자선 파티였습니다.
그들은 수십만 달러의 기부금을 내고 파티의 호스트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부와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서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을 사상 최고가에 낙찰받는 것은
그들의 재력과 문화적 세련됨을 동시에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미술품은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최고의 투자 상품이 되었습니다.
상징이 된 소비
이 시대 신흥 부호들의 소비는 단순한 사치를 넘어 하나의 사회적 언어이자 상징 체계였습니다.
맨해튼 5번가의 펜트하우스 햄튼의 해변 별장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의 정장
그리고 스위스 명품 시계는 모두 그들이 속한 승자 그룹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기호였습니다.
베니티 페어나 W와 같은 잡지들은 경쟁적으로 그들의 화려한 파티와
호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중계했고 대중은 이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신화와 욕망을 소비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전반에 부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심어주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위화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낳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는 돈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며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낸
그야말로 제2의 도금 시대(Gilded Age)였습니다.

내부자 거래: 정보는 어떻게 무기가 되었나
정보의 비대칭성
1980년대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강력하고 은밀하게 거래된 상품은 바로 정보였습니다.
특히 기업의 인수합병 실적 발표 등 주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공개 내부 정보는
그것을 먼저 아는 소수에게 막대한 부를 보장하는 황금 티켓과도 같았습니다.
이론적으로 주식 시장은 모든 참여자가 공평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인수합병을 자문하는 투자은행 법률 검토를 하는 로펌 그리고 기업의 내부 사정을 꿰뚫고 있는 경영진은
일반 투자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보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이 정보의 비대칭성은 곧바로 부의 불평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누가 무엇을 아는가가 누가 돈을 버는가를 결정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반 보스키와 차익거래
이러한 내부자 거래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차익거래의 황제로 불렸던 이반 보스키입니다.
그의 주된 전략은 기업 인수합병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수합병 발표가 나면 목표 기업의 주가는 오르지만 최종 계약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실제 인수 가격보다 약간 낮은 가격에 거래됩니다.
보스키는 바로 이 가격 차이를 노렸습니다.
그는 내부자들로부터 M&A가 확실히 성사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여 막대한 차익을 남겼습니다.
그의 경이로운 투자 성공률은 시장의 찬사를 받았지만
그 이면에는 월스트리트의 최고위층과 연결된 거대하고 불법적인 정보 네트워크가 존재했습니다.
그는 정보가 어떻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규제 완화의 바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풀었나
레이건 행정부의 철학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광란은 정부의 의도적인 방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는 신념 아래
대공황 이후 구축된 금융 규제의 틀을 해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는 시장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는 모든 규제를 악으로 규정하고
보이지 않는 손의 자율적인 조정 능력을 맹신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철학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은행 증권 보험의 업무 영역을 엄격히 구분했던
글래스-스티걸 법과 같은 핵심 규제들이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
또한 증권거래위원회(SEC)를 비롯한 금융 감독 기구들은 예산 삭감과 권한 축소로 인해 ‘종이호랑이’로 전락했습니다.
이는 마치 고양이의 목에 걸려 있던 방울을 풀어주어
월스트리트라는 고양이가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것과 같았습니다.
S&L 위기, 규제 완화의 비극적 결과
규제 완화의 폐해는 저축대부조합(S&L) 위기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본래 지역사회의 서민들을 대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취급하던 건실한 금융기관이었던 S&L들은
규제 완화 이후 자신들의 능력과 전문성을 훨씬 뛰어넘는 위험한 투자에 뛰어들었습니다.
연방정부가 예금을 보증해준다는 사실을 믿고 경영진들은 도덕적 해이에 빠져
마이클 밀켄의 정크본드나 투기적인 상업용 부동산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 말 자산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수백 개의 S&L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했고
이들의 부실을 처리하기 위해 미국 납세자들은 수천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부담해야 했습니다.
이는 시장의 자유가 책임과 감독이라는 안전장치 없이 방치될 때
얼마나 끔찍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교훈이 되었습니다.
헤지펀드와 리스크 차익거래의 부상
규제 밖의 자유로운 영혼, 헤지펀드
1980년대는 규제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하는 새로운 유형의 금융 플레이어
즉 헤지펀드가 본격적으로 부상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헤지펀드는 소수의 부유한 개인이나 기관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사모 형태로 운용되는 펀드로 공모펀드에 적용되는 엄격한 규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그들에게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막대한 레버리지를 일으켜 원금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자금을 운용할 수 있었고
주가가 떨어질 때 수익을 내는 공매도를 포함하여
일반 펀드에서는 금지된 거의 모든 투자 전략을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조지 소로스가 이끄는 퀀텀 펀드는 이러한 헤지펀드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거시 경제의 흐름을 읽고 전 세계의 주식 채권 통화 시장을 넘나들며
과감한 베팅을 감행했고 때로는 한 국가의 중앙은행을 굴복시킬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인수합병의 그림자, 리스크 차익거래
적대적 M&A가 일상화된 시대는 리스크 차익거래라는 독특한 투자 전략을 발전시켰습니다.
기업 인수합병이 발표되면 인수 대상 기업의 주가는
보통 최종 인수 가격보다 약간 낮은 수준에서 거래됩니다.
이는 M&A 협상이 막판에 결렬될 수도 있다는 딜 실패 리스크 때문입니다.
리스크 차익거래자들은 바로 이 가격 차이를 수익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M&A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데 베팅하여 주식을 사들였고
그 예측이 들어맞으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반 보스키는 이 분야의 제왕으로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종종 내부자 정보라는 불법적인 무기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헤지펀드와 리스크 차익거래의 부상은 금융 시장을 더욱 전문화하고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규제받지 않는 거대 자본이 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새로운 위험을 낳았습니다.

S&L 위기: 규제 완화가 낳은 비극
도덕적 해이의 덫
1980년대 카우보이 자본주의 시대의 광기가 남긴 가장 참혹한 상처는
저축대부조합(S&L) 위기였습니다.
이 사건은 금융 규제 완화가 어떻게 선량한 의도를 넘어
파국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입니다.
위기의 시작은 1980년대 초 고금리로 인해 경영난에 빠진 S&L들을 구제하기 위한 규제 완화였습니다.
정부는 이들이 전통적인 주택담보대출 사업에서 벗어나
정크본드 상업용 부동산 개발 심지어 주식 투자까지 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기름을 부은 것은 연방정부가 예금자 보호를 위해
예금 보험 한도를 10만 달러까지 상향 조정한 조치였습니다.
이는 S&L 경영진들에게 사실상 백지수표를 쥐여준 것과 같았습니다.
투자에 성공하면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고 실패하더라도 그 손실은 정부
즉 납세자들이 대신 막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리스크는 사회 전체에 떠넘기고 이익은 사유화하는 도덕적 해이의 구조 속에서
S&L들은 브레이크 없는 투기 기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사기꾼과 부패 정치인의 합작품
상황은 단순한 경영 실패를 넘어 조직적인 범죄와 부패로까지 번졌습니다.
찰스 키팅과 같은 탐욕스러운 S&L 경영자들은 고객의 예금을 마치 자신의 쌈짓돈처럼 여기며
초호화 제트기 명화 수집 호화 파티에 탕진했습니다.
그들은 회계 장부를 조작하여 막대한 손실을 감추고
오히려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는 것처럼 투자자들을 속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범죄가 정치권의 비호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S&L 업계는 막대한 정치 후원금을 뿌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감독 당국의 감시를 무력화시켰습니다.
키팅 파이브 스캔들은 당시 금융 자본과 정치가 얼마나 부패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 말 자산 거품이 꺼지면서 수백 개의 S&L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고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1987년 검은 월요일: 영원할 것 같던 파티의 끝
예고된 붕괴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의 주식 시장 붕괴는 많은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재앙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전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5년간 이어진 강세장으로 주식 시장은 이미 기술적 과열 상태에 접어들어 있었고
투자자들의 낙관론은 비이성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경제 펀더멘털 측면에서도 위험 신호는 켜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무역적자와 재정적자)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리려는 국제적인 공조는
오히려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프로그램 매매’라는 새로운 불쏘시개가 등장했습니다.
특히 포트폴리오 보험이라 불리는 전략은 주가가 특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대규모 매도 주문을 내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시장 하락 시 그 하락을 걷잡을 수 없이 증폭시키는 자동 폭파 장치와도 같았습니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무대 위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패닉, 모든 것을 삼키다
붕괴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럽을 거쳐 마침내 월스트리트에 상륙했습니다.
10월 19일 뉴욕 증시가 개장하자마자 포트폴리오 보험을 비롯한
프로그램 매매 물량이 쏟아져 나오며 주가는 수직으로 낙하했습니다.
이는 투자자들의 심리에 불을 붙였고 시장은 걷잡을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주문이 폭주하면서 거래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고
투자자들은 공포에 질려 묻지 마 투매에 나섰습니다.
다우존스 지수는 단 하루 만에 508포인트 22.6%라는 전무후무한 폭락률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1929년 대폭락 당시의 하락률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였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이 완전히 실종되고 오직 생존 본능만이 지배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습니다.
다행히 연방준비제도의 신속한 유동성 공급으로 금융 시스템 전체의 붕괴는 막을 수 있었지만
검은 월요일은 현대 금융 시스템이 기술과 인간의 공포가 결합할 때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경고로 남았습니다.

마이클 밀켄 제국의 몰락
내부자 거래 스캔들의 후폭풍
1987년 검은 월요일이 월스트리트 전체에 닥친 위기였다면
마이클 밀켄 제국의 몰락은 탐욕의 시대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파멸에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였습니다.
그의 몰락을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는 차익거래의 황제 이반 보스키의 자백이었습니다.
내부자 거래 혐의로 궁지에 몰린 보스키는 자신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연방 검찰에 협조하기로 결정했고
그 과정에서 월스트리트 내부자 거래 네트워크의 최정점에 마이클 밀켄이 있음을 폭로했습니다.
이는 거대한 댐의 작은 균열과도 같았습니다.
보스키의 자백을 시작으로 밀켄과 드렉셀이 지난 수년간 쌓아 올린
불법과 비리의 제국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방 검찰의 수사망은 밀켄의 최측근들을 차례로 옭아맸고
마침내 정크본드의 왕 자신을 정조준했습니다.
세기의 재판과 몰락
1989년 마이클 밀켄은 공갈 내부자 거래 시세 조종 등
98개에 달하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이는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금융 범죄 수사였습니다.
한때 미국 대통령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던 그는
이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피고인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밀켄은 검찰과의 플리바겐(Plea Bargain)을 통해
일부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형량을 줄이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10년의 징역형과 6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벌금을 선고받았고
금융계에서 영원히 추방되었습니다.
그의 유죄 판결은 단순히 한 개인의 몰락을 넘어 1980년대 월스트리트를 지배했던
탐욕은 선하다는 시대정신의 파산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정크본드 시장의 붕괴와 그 후폭풍
신용 경색과 기업의 도미노 파산
마이클 밀켄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정크본드 시장은 투자자들의 신뢰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붕괴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980년대 내내 정크본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며 성장해 온
수많은 기업들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LBO를 통해 과도한 부채를 짊어졌던 기업들은 만기가 돌아오는 채무를 상환하기 위해
발행해야 할 새로운 정크본드의 투자자를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금줄이 막힌 기업들은 연쇄적으로 부도를 맞았고
이는 미국 경제 전체에 신용 경색이라는 차가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건강한 기업들조차 은행 대출이 막히고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투자를 줄이고 직원을 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의 화려했던 파티가 끝나고 1990년대 초 미국 경제는
깊고 고통스러운 경기 침체의 숙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S&L 위기의 심화
정크본드 시장의 붕괴는 이미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던
저축대부조합(S&L) 위기를 결정적으로 폭발시킨 뇌관이 되었습니다.
규제 완화 이후 수많은 S&L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고위험 고수익 자산인 정크본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왔습니다.
그러나 시장이 붕괴하면서 그들이 보유했던 정크본드는 말 그대로 쓰레기가 되어버렸고
이는 S&L들의 재무 상태를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시켰습니다.
결국 S&L의 연쇄 파산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이는 미국 정부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을 투입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정크본드 시장의 붕괴는 밀켄의 제국뿐만 아니라 그와 공생하며 탐욕의 시대를 즐겼던
수많은 금융기관들을 함께 파멸로 이끌었던 1980년대 자본주의의 비극적인 결말이었습니다.
카우보이 자본주의가 남긴 유산
금융 혁신의 가속화
1980년대 카우보이 자본주의 시대는 수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현대 금융의 모습을 결정짓는 중요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나고 발전했던 정크본드 LBO 그리고 다양한 파생상품들은
이제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표준적인 도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크본드는 여전히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에게 중요한 자금 조달 창구가 되고 있으며
LBO는 사모펀드 산업의 핵심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도구들은 자본을 필요한 곳에 보다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에서는 소외되었던
새로운 기업들에게 성장 기회를 제공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리스크를 세분화하고 가격을 매기고 거래하는 기술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오늘날 금융 산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주 자본주의의 확립
기업 사냥꾼들이 월스트리트를 활보하던 시대는 주주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미국 기업 문화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끊임없는 적대적 M&A의 위협 속에서 기업 경영자들은
더 이상 안정적인 경영에만 안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주들의 이익 즉 주가를 높이는 것을 경영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기업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업들이 고용 안정이나 장기적인 연구개발 투자보다는
스톡옵션이나 자사주 매입과 같은 단기적인 주가 부양책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주주가 기업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생각은 이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그로 인한 그림자 또한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금융 세계화의 가속: 밀켄 이후의 시대
국경 없는 자본의 시대
마이클 밀켄의 몰락과 함께 1980년대가 막을 내렸지만
그가 열었던 금융 혁신의 판도라 상자는 오히려 전 세계로 더욱 활짝 열렸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냉전의 종식은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승리를 의미했고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자본이 빛의 속도로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전까지 각국의 규제와 통제 속에 갇혀 있던 자본은 이제
그 어떤 장벽도 없이 전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거대 헤지펀드들은 아시아의 신흥 시장에 투자하고
유럽의 기업들은 뉴욕 증시에 상장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금융 위기가
한 국가의 문제를 넘어 전 세계로 번져나가는 새로운 위험을 낳았습니다.
파생상품, 세계를 덮다
월스트리트에서 탄생한 정교하고 복잡한 파생상품들은
금융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런던 프랑크푸르트 도쿄 홍콩 등 세계 주요 금융 중심지들은
이제 각국의 통화 금리 주가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수많은 파생상품들을 거래하는 거대한 시장이 되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 파생상품들을 이용하여 환율 변동이나
원자재 가격 변동과 같은 다양한 위험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을 더욱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지역에서 발생한 작은 충격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파생상품 계약의 연쇄 반응을 통해
전 세계 금융 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는 시스템 리스크가 상시적인 위협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밀켄 이후의 시대는 기회와 위험이 모두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 진정한 금융 세계화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카우보이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기술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말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카우보이들이 정크본드와 LBO라는 말을 타고 질주했다면
오늘날의 금융 카우보이들은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한 새로운 말을 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술입니다.
인간의 판단 속도를 아득히 뛰어넘는 초단타 매매를 가능하게 하는 알고리즘 트레이딩
수십억 개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시장의 미세한 비효율성을 찾아내는 인공지능
그리고 기존 금융 시스템의 바깥에서 새로운 화폐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암호화폐가 바로 그것입니다.
거래의 도구와 시장의 형태는 극적으로 변했지만 리스크를 감수하고
남들보다 먼저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여 막대한 부를 얻으려는 근본적인 욕망과 정신은 1980년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욕망을 더욱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탐욕과 공포의 역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1980년대 카우보이 자본주의 시대의 비극이
얼마나 정교하고 거대한 규모로 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S&L 위기를 낳았던 규제 완화 도덕적 해이 그리고 감독의 부재라는 문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거의 완벽하게 반복되었습니다.
정크본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위험했던 파생결합증권들은
월스트리트의 탐욕을 채우는 새로운 도구였을 뿐입니다.
최근 몇 년간 전 세계를 휩쓴 암호화폐 열풍이나 밈 주식 현상 속에서도
우리는 과거 투기 광풍의 역사가 남긴 뚜렷한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백 년 전 튤립 투기부터 오늘날의 디지털 자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집단적인 탐욕과 공포가 만들어내는 거품과 붕괴의 역사는
형태를 바꾸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