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 한양에서 쌀 값이 두배로 뛰다
이야기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가장 화려했던 도시 한양의 한 저잣거리에서 시작됩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한 어머니는 어제와 같은 양의 엽전을 내밀었지만
쌀가게 주인은 고개만 저을 뿐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쌀값이 두 배로 뛰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조 시대 한양 사람들이 매일 마주해야 했던 끔찍한 현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월급 빼고 다 오른다고 한탄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존 그 자체가 걸린 문제였죠.
쌀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었습니다.
월급이자 자산이었고 모든 물가의 기준이 되는 경제의 심장이었습니다.
그 심장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자 30만 한양 백성들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가격이 오르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쌀을 구하려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쌀을 파는 가게들은 오히려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상인들은 오늘 팔면 한 푼 남는데 내일 팔면 열 푼을 남길 수 있으니
굳이 오늘 팔 이유가 없다는 계산을 했습니다.
이렇게 시장에 풀려야 할 쌀들이 상인들의 창고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쌀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자 백성들의 집집마다 쌀독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밥 짓는 연기가 드문드문 끊기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시장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것은
언제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냉혹한 진리가 한양의 골목마다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쌀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대!”, “옆 동네는 벌써 쌀이 동났대!”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은 전염병처럼 번져나갔습니다.
이 소문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라는 불을 질렀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은 마비되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쌀을 사두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이러한 패닉 바잉은 가뜩이나 부족한 쌀을 더욱 귀하게 만들었고
쌀값은 부르는 게 값이 될 정도로 치솟았습니다.
수요가 가격을 올리고 오른 가격이 다시 공포를 낳아 더 큰 수요를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가 완성된 것입니다.
시장은 이미 정상적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왜 하필 정조 시대? 잘나가던 한양의 치명적 약점
정조 시대는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안정되고 문화가 꽃피던 시기였습니다.
정조라는 강력하고 현명한 왕의 리더십 아래 한양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상업이 발달하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자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양 드림을 꿈꾸며 수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결과 한양의 인구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30만 명에 육박하는 거대 도시로 팽창했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한 번영의 이면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치명적인 약점이 숨어 있었습니다.
한양으로 몰려든 30만 인구는 매일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쌀을 먹어야 하는 입 즉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했습니다.
하지만 쌀을 생산하는 논밭 즉 공급은 갑자기 늘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장기적으로는 생산 기반이 약해지는 셈이었죠.
한양이라고 모두가 잘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양반과 큰돈을 버는 상인들이 화려한 기와집에서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동안,
도시의 변두리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들에게 쌀값의 변동은 단순한 물가 상승이 아니었습니다.
소득의 대부분을 식비로 써야 했던 이들에게 쌀값 폭등은 곧 생존의 위협과 직결되었습니다.
번영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지만 위기의 고통은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처럼 극심한 양극화는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는 가장 큰 위험 요소였습니다.
한양의 번영이 역설적으로 쌀값 폭등이라는 재앙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셈입니다.
쌀은 어디로 사라졌나? 막혀버린 공급의 길
현대 사회는 웬만한 기상 이변에도 식량 공급이 마비되는 일이 드뭅니다.
전 세계적인 공급망과 비축 시스템 덕분이죠.
하지만 조선 시대는 달랐습니다.
쌀 생산의 모든 것은 오롯이 하늘에 달려 있었습니다.
끔찍한 가뭄과 갑작스러운 홍수는 그해 쌀 수확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정 지역의 흉작 소식 하나만으로도 전국의 쌀값은 요동쳤습니다.
지방에서는 쌀이 남아도는데 한양에서는 쌀이 없어 굶주리는 아이러니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바로 끔찍할 정도로 낙후된 물류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전국을 잇는 고속도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길은 비만 오면 진창으로 변하는 좁은 흙길이었습니다.
이 길 위를 수레 대신 말이나 소의 등에 혹은 사람이 직접 쌀가마니를 지고 날랐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강원도에서 생산된 쌀을 서울까지 지고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을까요?
이 모든 비용은 고스란히 쌀값에 포함되었고,
산지에서는 100원이었던 쌀이 한양에 오면 500원이 되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었습니다.
육로가 이토록 엉망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강을 이용했습니다.
특히 전국의 물자가 모여드는 한강은 조선 경제의 대동맥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대동맥을 장악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경강상인이라 불리는 상인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력으로 선박과 창고를 독점하고 때로는 담합을 통해
쌀의 공급량을 조절하며 가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종하기도 했습니다.
경쟁이 없는 시장, 소수에게 장악된 공급망은 언제나 소비자에게 그 피해를 떠넘기게 마련이었습니다.
칼과 창이 겨누는 길: 왜구와 산적의 위협
지방에서 한양까지 쌀을 옮기는 길은 단순히 험난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전쟁터였습니다.
바닷길은 조류와 태풍뿐만 아니라 바다의 무법자인 왜구의 주된 활동 무대였습니다.
특히 조선의 주요 곡창지대인 삼남 지방에서 세곡선이나 상선이 출발하면,
왜구들은 귀신같이 그 정보를 알아채고 길목을 지켰다가 배를 습격했습니다.
그들에게 쌀은 더없이 좋은 전리품이었고, 상인과 선원들은 저항하다 죽거나 바다에 수장되기 일쑤였습니다.
국가의 세곡선마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판에,
민간 상선이 겪어야 했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육지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국 곳곳의 깊은 산과 험한 고갯길은 산적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이들은 굶주린 백성들이나 전문적인 도적 무리로, 쌀을 운반하는 행렬을 노리는 하이에나와 같았습니다.
특히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면, 산적들의 활동은 더욱 극성을 부렸습니다.
상인들은 쌀을 지키기 위해 사설 경호원인 표사를 고용해야 했지만,
작정하고 달려드는 수십 명의 산적떼 앞에서는 역부족일 때가 많았습니다.
쌀을 빼앗기는 것은 그나마 나은 경우였고, 재물과 목숨을 모두 잃고
곡소리 없는 무덤의 주인이 되는 상인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처럼 상인들이 짊어져야 했던 목숨의 무게는 단순한 운송비가 아니라, 그야말로 피눈물이 섞인 위험 비용으로서 쌀값에 고스란히 전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기는 나의 힘! 시장을 교란한 투기꾼들의 등장
위기는 누군가에게는 고통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됩니다.
쌀값이 불안정해지자 자본력을 가진 일부 상인들은 이 상황을 돈벌이의 기회로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쌀값은 앞으로 더 오를 것이라는 데에 베팅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 풀릴 쌀을 닥치는 대로 사들여 자신들의 창고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매점매석입니다.
그들의 창고가 쌀로 가득 찰수록 시장의 쌀은 자취를 감추었고 가격은 그들의 예상대로 폭등했습니다.
그들은 위기를 예측한 것이 아니라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한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쌀의 전체 생산량이 얼마인지, 정부 창고에는 얼마나 비축되어 있는지와 같은 중요한 정보는
소수의 관리나 상인들에게 독점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보의 비대칭성은 투기꾼들에게는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아는 정보를 이용해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고
때로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시장의 불안 심리를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쌀을 사재기하고 폭리를 취한 상인들, 당연히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분노한 백성들과 골치 아픈 조정의 입장에서 그들은 모든 문제의 원흉 즉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만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그들이 유독 사악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런 행동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장의 구조적 허점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문제의 원인을 특정 집단의 탐욕으로만 돌리는 것은 가장 손쉬운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진짜 문제 즉 시스템의 결함을 보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칼로 물가를 잡을 수 있을까? 정조의 분노와 규제의 역설
쌀값 폭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왕이었던 정조는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간단하고 확실해 보이는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전하! 시장을 교란하고 폭리를 취하는 악덕 상인들을 잡아들여 엄벌에 처하소서!
그들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걸면 감히 누가 또 그런 짓을 하겠나이까?”
이것은 분노한 민심을 달래고 국가의 강력한 권위를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처럼 보였습니다.
정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로 국가의 힘으로 쌀 가격 자체를 통제하는 가격 상한제를 실시한 것입니다.
“쌀 한 말에 얼마 이상 받지 말라!”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을까요?
지방의 상인들은 한양까지 쌀을 힘들게 가져가 봤자 제값을 받지도 못하고
잘못하면 벌까지 받으니 차라리 안 가고 말겠다 생각했습니다.
결국 한양으로 들어오던 쌀의 공급이 뚝 끊겨 버렸고 공식적인 시장에서는 쌀을 구할 수 없게 되며
대신 뒷골목에서 원래 가격의 몇 배를 부르는 암시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나오는 풍선효과 즉 규제의 역설입니다.
물론 정부도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라의 창고를 열어 비축해 둔 정부미를 시장에 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습니다.
30만 인구의 거대한 수요 앞에서 정부가 가진 쌀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또 다른 혼란만 가중되었습니다.
결국 정부의 선의 가득한 정책들은 문제의 근본 원인인 공급 부족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임시방편에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를 외친 한 남자, 박지원
조정의 모든 신하가 “상인들을 벌해야 합니다!”라고 외치고
정조마저 그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조정의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던 아웃사이더 바로 연암 박지원이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왕의 눈치를 보며 분노에 편승할 때 홀로 왕의 분노가 불러올 더 큰 재앙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인 한두 명의 목을 베는 것보다 굶주리는 수많은 백성의 텅 빈 밥그릇을 더 걱정했던 것입니다.
박지원은 명문 양반가 출신이었지만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하던 지식인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오랑캐라며 멸시하던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그들의 장점을 배워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북학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낡은 명분이나 체면보다 백성의 실제 삶을 개선하는 쓸모 있는 학문을 추구했던 진정한 실용주의자였던 셈입니다.
그의 생각은 단순한 탁상공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직접 청나라를 여행하며 자신의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기록한 것이 바로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닙니다.
박지원은 조선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벽돌 건물, 쉴 새 없이 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레,
잘 닦인 도로와 활기 넘치는 시장의 모습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청나라의 부유함이 바로 이처럼 활발한 유통과 상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연암의 진단: “가격이 아니라 길이 문제입니다”
모두가 쌀값이라는 현상에만 매달려 허둥댈 때 박지원은 의사처럼 냉철하게 문제의 근본 원인을 진단했습니다.
그는 쌀값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은 병의 증상일 뿐 진짜 병의 원인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박지원이 보기에 진짜 병의 원인은 가격이 아니라 쌀이 한양까지 제대로 도착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모든 과정 즉 공급 시스템의 문제였습니다.
쌀의 절대적인 양이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쌀조차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데
가격만 억누른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었습니다.
박지원은 정조를 향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전하, 지금 전국의 상인들이 한양의 쌀값이 비싸다는 소문을 듣고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쌀을 싣고 한양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쌀을 비싸게 판다고 상인을 벌하신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들이 무서워서 발길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되면 한양으로 들어오는 쌀의 공급은 완전히 끊기고 쌀값은 지금보다 훨씬 더 폭등할 것입니다.“
이것은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은 통찰이었습니다.
박지원의 경제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흐름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시장을 거대한 강물에 비유했습니다.
강물이 넘친다고 해서 둑을 쌓아 무작정 막기만 하면 언젠가는 더 약한 곳에서 둑이 터져 더 큰 홍수가 나게 됩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강물의 흐름을 막는 장애물을 치워주고 새로운 물길을 터주어 물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시장의 문제 역시 억지로 막고 통제하려 들면 부작용만 커질 뿐입니다.
첫 번째 처방: 막힌 혈관을 뚫어라! 길과 수레의 경제학
당시 관리들은 조선은 길이 험해서 수레를 쓸 수 없다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박지원은 이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을 겁니다.
그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길이 없어서 수레를 못 쓰는 것이 아니라 수레를 안 쓰니 길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먼저 수레를 보급하고 널리 사용하게 하라. 그러면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저절로 길을 넓히고 닦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쟁을 끝내는 상식을 뒤엎는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수레 한 대는 말 수십 마리 혹은 사람 수백 명이 운반할 수 있는 짐을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수레의 보급은 단순히 편리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통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는 경제적인 해법이었습니다.
박지원은 상인을 벌하고 가격을 통제하는 인위적인 대책보다
이처럼 공급망의 효율성을 높이는 구조적인 해결책이야말로 진정한 물가 안정 대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잘 닦인 도로와 수많은 수레가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전라도에서 풍년이 들어 쌀이 남아돌면 그 쌀이 며칠 만에 흉년이 든 함경도까지 신속하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지역 간의 물자 불균형이 해소되고 전국의 쌀값은 점차 비슷한 수준으로 안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프라가 가진 시장 통합의 힘입니다.
박지원이 꿈꾼 것은 조선 팔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묶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처방: 돈이 돌게 하라! 상인을 경제의 심장으로
당시 양반들은 상인들이 이익을 좇는 것을 천하고 부도덕한 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박지원의 생각은 180도 달랐습니다.
그는 이윤을 추구하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인들의 이기심을 무조건 억누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정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판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상인들은 더 열심히 물자를 유통시킬 것이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박지원은 조선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가 사농공상이라는 낡은 신분 의식에 갇혀
상인과 장인을 천시하는 문화라고 보았습니다.
땀 흘려 물건을 만들고 위험을 무릅쓰고 상품을 유통시키는 이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는
결코 부강해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습니다.
그는 상업을 나라의 근간을 좀먹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부를 창출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핵심적인 활동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물건이 원활하게 돌기 위해서는 돈이 잘 돌아야 합니다.
박지원은 상품 유통을 활성화하기 위해 화폐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돈이 활발하게 유통되면 땅이나 곡물처럼 묶여 있던 부가 생산적인 곳에 투자될 수 있고
이는 경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세 번째 처방: 국경을 넘어라! 바다가 새로운 쌀 창고다
박지원의 시선은 단지 조선 땅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인데 우리는 왜 이 길을 사용하지 않는가?’
꽉 막힌 육로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드넓은 바다를 새로운 길로 삼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바다는 그 자체로 거대한 고속도로이자 새로운 가능성의 창고였습니다.
여기서 박지원의 생각은 더욱 대담해집니다.
그는 바닷길이 단지 조선 안에서만 통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길은 중국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더 먼 세상으로 뻗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조선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쌀이 부족하다면 다른 나라에서 쌀을 수입해 오면 됩니다.
반대로 조선에서 흔한 인삼이나 비단은 다른 나라에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역의 기본 원리입니다.
박지원은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 애쓰기보다는 우리가 더 잘하고 잘 만들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우리가 부족한 것은 다른 곳에서 구해오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가 우리보다 더 싼값에 쌀을 생산할 수 있다면
그 쌀을 사 오는 것이 우리 백성들에게는 더 이득일 수 있습니다.
쇄국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박지원은 200년 앞서 경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 앞에서의 경제 과외: “가격은 시장의 목소리입니다”
정조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싼 쌀값을 상인의 탐욕이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박지원은 그 가격표 뒤에 숨겨진 복잡한 경제적 신호를 읽어냈습니다.
그는 왕에게 이렇게 설명했을 겁니다.
“전하, 지금의 높은 쌀값은 단지 상인들의 탐욕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가격 속에는 험한 길을 뚫고 쌀을 운송해 온 위험 비용이 포함되어 있고
쌀 자체가 귀해졌다는 희소성의 신호가 담겨 있으며
앞으로 쌀을 더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 녹아 있습니다.”
즉 가격은 시장의 상태를 알려주는 가장 정직한 목소리이자 온도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온도계가 고열을 가리킨다고 해서 온도계를 얼음물에 담가 수치를 낮추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환자의 상태를 파악할 기회만 놓치게 될 뿐입니다.
박지원이 보기에 정부가 인위적으로 가격을 통제하는 것은
시장이 “공급이 부족해요! 위험해요!”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강제로 억누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결국 시장의 자율적인 치유 능력을 마비시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정부의 보이는 손 vs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정조는 결코 어리석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했고 굶주리는 백성을 눈앞에 두고 시장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니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방치처럼 느껴졌일 겁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격을 통제하고 악덕 상인을 처벌하며 쌀을 나눠주는 보이는 손의
역할이야말로 군주의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케인스주의 경제 철학과도 맞닿아 있는 생각입니다.
반면 박지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정부가 축구 경기의 선수로 직접 뛰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의 역할은 선수들이 공정하게 경기를 할 수 있도록 경기장을 잘 만들고
규칙을 어기는 선수가 없는지 감시하는 심판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장이라는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자유롭게 뛰놀게 내버려 두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장 효율적인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고전학파 경제학의 핵심 사상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정부의 개입이 오히려 시장을 망치는 정부 실패의 위험,
그리고 시장에만 맡겨두었을 때 발생하는 독과점이나 양극화 같은 시장 실패의 위험.
이 두 가지 위험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는 200년 전 정조 시대의 가장 큰 고민이었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가장 어려운 숙제입니다.
나쁜 규제 vs 좋은 규제, 연암이 그린 큰 그림
박지원은 규제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규제가 나쁘고 어떤 규제가 좋은지를 명확하게 구분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가장 나쁜 규제는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고 결과를 직접 통제하려는 규제였습니다.
“쌀은 한 말에 얼마 이상 받지 말라”는 식의 가격 통제는 시장이 보내는 중요한 신호를 왜곡하고
공급자들의 의욕을 꺾어버리는 나쁜 규제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박지원이 생각한 좋은 규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시장의 흐름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흐르도록 돕는 규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수레의 바퀴 폭을 통일하는 표준 규제나
독점 상인이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막는 공정 거래 규제 같은 것들입니다.
이처럼 좋은 규제는 시장 참여자들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거래 비용을 낮추며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박지원이 그린 큰 그림 속에서 규제의 최종 목표는 억제가 아니라 조성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경쟁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공정한 운동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부와 규제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통제와 간섭이 아닌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박지원의 규제 철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는 왜 상인의 편에 섰는가: 인센티브에 대한 깊은 이해
백성들의 눈에 박지원의 주장은 자칫 악덕 상인 편들기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상인이라는 개인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움직이는 원리에 주목했습니다.
쌀은 발이 달리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이익을 기대하고 위험을 무릅써야만 쌀은 산지에서 소비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상인입니다.
따라서 상인들이 움직일 유인 즉 인센티브를 없애버리면
쌀의 움직임도 멈춰버린다는 것이 박지원의 생각이었습니다.
상인의 활동은 겉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사실 수많은 위험을 동반합니다.
박지원은 이처럼 높은 위험을 감수한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높은 이익이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위험은 큰데 돌아오는 이익이 없거나 오히려 처벌을 받는다면
아무도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한양의 높은 쌀값에는 상인들의 탐욕뿐만 아니라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한 것에 대한 위험 프리미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박지원은 인간이 천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기심을 어떻게 사회 전체에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경쟁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부가 증대되고 자원이 가장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그의 꿈은 왜 실현되지 못했을까?
박지원의 아이디어는 혁신적이었지만 그것을 실현하기에는
조선 사회의 기득권이라는 벽이 너무나 높고 단단했습니다.
수레와 도로가 발달하면 한강 유통을 독점하던 경강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잃을 것이 뻔했고
상업이 발달하면 양반 지배층의 권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화는 누군가에게는 기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위협입니다.
또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비용이 따릅니다.
당장의 성과가 보이지 않는 이 막대한 투자 앞에서 대부분의 관리들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있나? 그냥 하던 대로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관성의 힘은 아무리 위대한 천재의 아이디어라도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중력과도 같았습니다.
어쩌면 박지원의 실패는 그의 생각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맞아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진단과 처방은 18세기 조선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급진적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외침은 거대한 사회의 벽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연암의 경고, 외면의 대가
그렇다면 연암 박지원의 제안을 외면하고, 낡은 규제와 관성만을 고집했던 조선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는 그 질문에 대해 너무나도 참혹한 답을 들려줍니다.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라 불렸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박지원이 그토록 우려했던 시스템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의 사유화와 시스템의 붕괴: 세도정치의 그늘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닌, 왕의 외척 가문 몇몇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세도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안동 김씨와 같은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자,
박지원이 말했던 ‘공정한 운동장’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관직은 능력과 상관없이 뇌물의 액수로 결정되었고,
국가의 모든 정책은 백성의 안위가 아닌 특정 가문의 이익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특히 박지원이 지적했던 시스템의 문제는 ‘삼정의 문란’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폭발했습니다.
토지세(전정), 군역(군정), 그리고 빈민 구제를 위한 곡식 대여 제도(환곡)는
모두 백성을 수탈하는 도구로 변질되었습니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환곡이었습니다.
봄에 굶주리는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약간의 이자와 함께 돌려받던 제도는,
강제로 곡식을 빌려주고 몇 배의 이자를 붙여 빼앗아가는 고리대금업으로 타락했습니다.
결국 박지원이 경고했던 시스템의 실패는,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조선 사회 전체를 좀먹는 암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끓어오른 민심, 홍경래의 난과 임술농민봉기
수탈이 임계점을 넘어서자, 억눌렸던 백성들의 분노는 마침내 거대한 봉기로 터져 나왔습니다.
1811년, 몰락 양반 홍경래를 중심으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일대를 휩쓸며
조정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862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봉기가 전국 수십 개 지역으로 번져나가는 ‘임술농민봉기’가 발생했습니다.
박지원이 ‘시장의 목소리’라고 말했던 가격 신호를 억누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시장의 목소리가 묵살되자, 이제는 백성들이 직접 칼과 죽창을 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지만,
이는 곪아 터진 상처를 잠시 덮어둘 뿐, 병의 근원을 치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미 국가는 내부로부터 완전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쇄국의 빗장, 스스로를 가둔 제국
박지원이 바다를 새로운 길로 삼고 세계와 교류하자고 외쳤던 18세기 후반,
세계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조선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오히려 문을 더욱 굳게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선택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 것은, 당시로서는 비장한 결단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박지원의 통찰과는 정반대의 길이었습니다.
조선은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거대한 파도 앞에서 등을 돌린 채 모래성을 쌓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빠르게 국력을 키우고 있을 때,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적 명분론에 갇혀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외부의 위협에 맞서 내부를 개혁할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셈이었습니다.
결국 굳게 닫혔던 조선의 문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닌,
일본 군함의 포구 앞에서 굴욕적으로 열리게 됩니다(강화도조약, 1876년).
한번 열린 문으로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이 밀려 들어왔고,
내부 시스템을 개혁하지 못해 체력이 고갈된 조선은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었습니다.
18세기, 한 천재가 제시했던 개혁의 길이 외면당한 대가는 한 세기 후, 나라를 잃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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