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새로운 화폐의 꿈
조선 왕조가 막을 연 14세기 말,
한반도의 경제는 화폐 경제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고려 말부터 이어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수탈은
화폐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철전, 동전, 은병 등 다양한 금속 화폐가 있었지만
그 유통은 일부 계층과 특정 지역에 한정되었습니다.
대다수 백성의 일상적인 거래는 화폐가 아닌 현물,
즉 쌀이나 옷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고스란히 안고 가는
전근대적 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가치의 측정, 저장, 운반이 모두 불편했으며
이는 상업 발전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족쇄로 작용했습니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이 새로운 국가 조선을 세웠을 때,
그들의 과제는 단순히 정치적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이처럼 파편화되고 비효율적인 경제 시스템을 일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통일되고 효율적인 화폐 제도의 확립이 그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새로운 왕조는 새로운 정치 질서에 걸맞은 새로운 경제 질서를 꿈꾸었고
그 중심에는 국가가 발행하고 그 가치를 보증하는
강력한 공인 화폐의 필요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은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꿈꿨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는 모든 것이 국가의 통제와 계획 아래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시장의 자율적인 흐름이나 민간의 경제 활동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함으로써 부의 편중을 막고
농업을 근본으로 하는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화폐 발행은 단순한 경제 정책을 넘어,
국가가 경제 전체를 주도하고 통제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국가가 화폐 발행권을 독점한다는 것은
곧 가치의 기준을 국가가 정하고
모든 경제 활동을 국가의 손아귀 안에 두겠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왕의 돈을 만들어 백성의 주머니를 채우고
그 돈이 전국 방방곡곡에 돌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시장의 힘을 왕의 보이는 권력 아래 종속시키려는 거대한 야심이었습니다.
왜 종이돈이었나?: 금속 화폐의 한계
국가 주도의 화폐 경제를 확립하려는 야심은 컸지만
현실적인 제약은 명확했습니다.
바로 화폐의 재료가 될 금속, 특히 동의 절대적인 부족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동 생산량이 매우 적었고
대부분을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는 화폐 발행의 주도권이 원자재 수급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흔들릴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금속 화폐의 본질적인 한계는 국가에게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종이돈이었습니다.
종이돈은 원재료인 닥나무가 국내에서 충분히 조달 가능했기에
원자재의 제약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또한 국가의 인쇄 기술만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여
발행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신용과 권위만으로 가치를 보증할 수 있다면
종이돈은 금속 부족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꿈의 화폐처럼 보였습니다.
저화(楮貨), 국가 권력의 상징
조선 건국 초기, 화폐 제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지만
획기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깬 것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 이방원이었습니다.
태종은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잡은 인물로
누구보다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 강화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화폐 경제가 왕권 안정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태종에게 화폐 개혁은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핵심적인 정치적 과제였습니다.
그는 하륜 등 측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402년 마침내 저화 발행을 결정합니다.
이는 국가가 신용을 담보로 가치를 창출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대담한 시도였습니다.
저화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졌으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물 가치가 없었습니다.
오직 국왕의 명령, 즉 국가의 권위만이 그 가치를 보증하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태종의 결단은 이제부터 모든 가치의 기준은 국가가 정한다는 강력한 선언이었으며
저화는 그 선언을 뒷받침하는 물리적인 상징물이었습니다.
저화의 도안과 명칭에는 국가의 의도가 명확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저화에는 조선통보라는 글자와 함께 위조를 막기 위한 복잡한 문양과
국가의 공식 인장인 보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저화를 사용할 때마다, 그들은 거래 행위 속에서 국가의 존재와 권력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정부는 저화 1장의 가치를 쌀 1말 또는 면포 1필과 동일하게 고정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실물 화폐를 국가가 정한 가치 체계 안으로 흡수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처럼 저화는 경제적 기능을 넘어
백성의 일상에 국가의 통제력을 각인시키려는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상징물이었습니다.
세계사 속 종이돈과 저화의 위상
조선의 저화가 세계 최초의 종이돈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국에서는 송나라의 교자를 시작으로 원나라의 보초에 이르기까지
지폐 사용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화는 중국의 지폐와는 다른 중요한 맥락을 가집니다.
중국의 지폐는 상업이 발달한 기반 위에서
상인들의 필요에 의해 잉태된 측면이 강했습니다.
반면, 조선의 저화는 상업이 미미하고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순전히 국가의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위로부터 강제로 이식된 사례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국가 권력이 시장의 자연스러운 발달 단계를 무시하고
규제를 통해 인위적으로 화폐 경제를 창출하려 했던 거대한 실험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저화의 실패는 국가 주도의 급진적인 규제가 시장의 현실과 충돌했을 때
어떤 비극을 낳는지를 보여주는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례입니다.
규제의 시작: 저화 유통 강제령
저화 발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이 낯선 종이돈을
사용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화 유통을 정착시키기 위한 첫 번째 수단은 강력한 법령, 즉 규제였습니다.
1402년 저화가 발행되자마자
정부는 모든 공사 거래에서 저화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법령을 공포했습니다.
이 법령의 핵심은 기존의 실물 화폐였던 쌀과 면포의 화폐 기능을 공식적으로 박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세금을 낼 때도, 관청에서 물품을 구매할 때도
심지어 민간의 거래에서도 오직 저화만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는 시장의 거래 방식을 국가가 법으로 완전히 재편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처벌과 강제 순환의 구조
규제는 필연적으로 처벌 조항을 동반했습니다.
저화를 받지 않거나 여전히 쌀이나 면포를 사용하려는 자들은
국법을 어지럽히는 자로 규정되어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본보기 처벌을 통해 시장 전체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규제의 역설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처벌이 두려워 겉으로는 저화를 받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거래를 꺼리거나 저화의 가치를 대폭 깎아서 물건값을 계산했습니다.
강압적인 규제와 처벌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신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처벌이라는 채찍과 함께 당근도 제시했습니다.
모든 관리와 군인에게 녹봉을 저화로 지급하여
강제로 저화의 최초 사용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관청 물품 구매 시 저화로 대금을 지불하여
상인들이 저화를 받도록 유도했습니다.
하지만 이 구조에는 신뢰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관리들조차 저화를 받자마자 서둘러 실물 자산으로 바꾸려 했고
상인들은 저화를 받는 즉시 세금으로 내버리거나 다른 이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저화는 뜨거운 감자처럼 누구도 오래 쥐고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시장의 첫 번째 저항: 가치의 불신
백성들이 저화를 불신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종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수백 년간 그들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실물 자산에 의존해 살아왔습니다.
쌀은 생명의 원천이었고 면포는 필수 의복이었습니다.
이들의 가치는 국가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반면 저화는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종이 조각에 불과했습니다.
유일한 가치는 국가가 보증한다는 추상적인 약속이었습니다.
평생을 흙과 씨름하며 살아온 농민에게, 국가의 약속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는
땀 흘려 수확한 쌀 한 톨의 구체적인 가치를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과거 화폐 실패의 학습 효과도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화폐 유통 실패의 경험은
국가가 발행한 화폐는 믿을 수 없다는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습니다.
더욱이 화폐 가치를 보증하는 국가 자체의 신용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있었습니다.
왕자의 난을 거쳐 세워진 불안정한 왕조의 약속을
백성들은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의 보증은 공익적 약속이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이기적인 선언으로 비쳤습니다.
면포와 쌀, 백성이 선택한 진짜 화폐
국가의 강력한 규제에 시장은 우회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국가 화폐인 저화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대안 화폐,
즉 쌀과 면포를 더욱 공고히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화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쌀과 면포의 화폐적 지위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가치를 믿을 수 없는 저화 대신
실물 가치가 보장되는 쌀과 면포로 거래하는 것을 압도적으로 선호했습니다.
시장에서 암묵적으로 ‘쌀 1말’ 또는 ‘면포 1필’을 기준으로 모든 물건의 가격이 매겨졌습니다.
이는 국가가 법으로 정한 가치 체계를 무력화하고
시장이 자생적으로 만들어낸 독자적인 가치 측정 기준이었습니다.
면포의 우월한 화폐적 기능
쌀과 면포 중에서도 특히 면포는 가장 강력한 실물 화폐로 군림했습니다.
쌀에 비해 가치 보존성이 뛰어났고
정부가 정한 규격 덕분에 표준화도 용이했습니다.
또한 쌀보다 운반과 분할이 편리하여 장거리 교역에 더 적합했습니다.
이러한 우월한 화폐적 기능 덕분에 면포는 단순한 물물교환의 매개를 넘어,
조선 전기 경제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기축통화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결국 저화 유통 강제 정책은 조선 경제를 기이한 이원적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한쪽에는 저화가 사용되는 공식 경제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쌀과 면포만이 통용되는 거대한 비공식 경제가 존재했습니다.
국가는 법령으로 경제를 통제한다고 믿었지만
실물과 신용이 흐르는 진짜 경제의 주도권은
이미 시장의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규제의 강화, 그리고 표류
시장의 저항이 거세지자 정부는 더욱 강력한 채찍을 꺼내 들었습니다.
저화 사용을 거부하는 행위는 ‘국법을 문란하게 하는’ 중죄로 다루어졌고
적발된 상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배를 가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본보기 처벌을 통해 시장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힘으로라도 저화를 유통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는 신뢰를 만들지 못했고
오히려 국가에 대한 반감과 저화에 대한 혐오감만 키웠습니다.
저화고 설치와 정책의 모순
채찍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정부는 회유책을 제시했습니다.
백성들이 원할 때 저화를 실물로 교환해주는 ‘저화고’를 설치한 것입니다.
저화의 가치를 국가가 실물로 보증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려는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저화고에 구비해 둘 실물 자산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저화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기 일쑤였고
이는 오히려 “역시 국가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만 키우는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강력한 처벌과 미흡한 회유책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저화 정책은 방향을 잃고 표류했습니다.
일관성 없는 정책이 반복되자 백성들은 국가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었고
저화라는 불확실한 자산을 보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반격
저화의 실패는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는 손 사이의 대결을 보여줍니다.
조선 정부는 법령과 처벌이라는 보이는 손을 이용해 시장을 주무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질서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국가가 강요하는 저화가 아니라
오랜 경험으로 가치가 증명된 쌀과 면포였습니다.
국가의 인위적인 규제는 이러한 시장의 자생적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수백만 백성의 현실적인 필요와 합리적인 선택이 모여 만들어진
보이지 않는 손이 왕의 권위라는 보이는 손을 압도해버린 것입니다.
국가의 강력한 규제는 시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가격 기구를 심각하게 왜곡시켰습니다.
정부는 저화 1장의 가치를 쌀 1말로 고정했지만
이는 시장 현실을 무시한 인위적인 가격 통제였습니다.
이러한 가격 왜곡은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 극심한 비효율을 낳았습니다.
규제가 강해질수록 그것을 회피하려는 시장의 창의성 또한 기발해졌습니다.
위장 거래, 할인 거래, 물물교환 활성화 등
백성들과 상인들은 국가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이러한 시장의 대응은 국가의 규제가 결코 완벽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신용 없는 화폐의 운명
화폐의 진정한 본질은 교환의 매개를 넘어선 신뢰에 있습니다.
내가 받은 돈이 내일도 동일한 가치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믿음.
그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화폐는 종이 조각에 불과합니다.
조선 정부는 국가의 권위와 강제력만으로 신뢰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신뢰는 명령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약속이 일관되게 지켜지는 경험을 통해 쌓이는 사회적 자산입니다.
결국 저화는 화폐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인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고
그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신뢰를 잃은 저화는 가치의 저장 기능도 완벽하게 상실했습니다.
정부의 남발 가능성과 시장의 불신으로 저화의 실질 가치는 계속 하락했습니다.
사람들은 저화를 손에 넣는 즉시 가치가 안정적인 실물 자산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가치의 저장 기능을 상실한 화폐는 더 이상 화폐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저화는 회계의 단위로서의 권위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가치가 매일 흔들리는 불안정한 잣대로는 다른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잴 수 없었습니다.
시장은 면포나 쌀을 실질적인 회계 단위로 사용했습니다.
신뢰를 잃은 화폐는 모든 핵심 기능을 상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부의 딜레마: 찍어낼수록 추락하는 가치
저화 유통이 실패하면서 조선 정부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가치를 안정시켜야 했지만 부족한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저화를 더 찍어내고 싶은 강한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재정이 부족할 때마다 저화를 찍어내 위기를 넘기는 것은
현대 경제학에서 말하는 재정의 화폐화와 같은 원리입니다.
결국 정부는 단기적인 재정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저화를 추가로 발행하는 손쉬운 길을 택하고 맙니다.
이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미래로 떠넘기는 미봉책이었으며
저화의 가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자살골이었습니다.
정부가 저화를 남발하자 시장에는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저화의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고 물건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이러한 가치 하락은 백성들의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자극했습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저화의 가치가 더욱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손에 들어오는 즉시 실물로 바꾸려 했습니다.
이러한 화폐 도피 현상은 가치 하락을 더욱 가속하는 악순환을 만들었습니다.
정부의 저화 남발은 스스로 추진하던 신뢰 회복 정책과도 정면으로 배치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실물로 바꿔주겠다 약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약속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정부는 정책적 자충수를 두며 저화와 함께 국가 신용마저 떨어뜨렸습니다.
저화의 종말, 규제의 공식적 실패
태종 시대에 시작된 저화 정책의 실패는
세종 시대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시장에서 저화는 화폐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세종과 조정 신료들은 마침내
저화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에 착수했습니다.
이는 국가가 마침내 자신들의 규제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시장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저화의 실패를 인정한 정부는 실물 화폐로의 복귀를 모색했습니다.
세종은 1423년 동전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고질적인 동 부족 문제와 함께 저화 실패의 트라우마가 남긴
국가가 만든 돈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1445년, 세종은 마침내 저화의 유통을 사실상 포기하고,
면포와 쌀을 공식적인 교환 수단 및 세금 수납 수단으로 인정하는 조치를 내립니다.
이는 국가가 수십 년간 추진해온 화폐 정책의 완전한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백기 투항이었습니다.
규제는 시장을 이길 수 없었고
왕은 백성의 주머니를 끝내 믿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실패가 남긴 상처: 화폐 경제의 후퇴
저화의 실패가 남긴 가장 큰 상처는
화폐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었습니다.
국가가 만든 돈은 믿을 수 없다는 강력한 트라우마는
화폐 경제의 근간이 되는 신뢰를 송두리째 파괴했습니다.
이 트라우마는 숙종 때 상평통보가 발행되기 전까지 조선이 거의 200년 가까이
화폐 없는 사회나 다름없는 상태로 회귀한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화폐가 사라지자
조선 경제는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물물교환 경제로 완전히 회귀했습니다.
쌀과 면포는 화폐로서 명백한 한계가 있었고
이는 장거리 교역이나 대규모 상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저화 발행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국가 재정 안정이었지만
실패 후 조세의 현물화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재정 운영에 엄청난 비효율을 초래했습니다.
규제의 실패가 단기적인 혼란을 넘어, 국가 시스템 전체에 장기적인 비효율과 부담을 안겨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뼈아픈 사례입니다.
역설의 교훈: 신용은 강제할 수 없다
저화의 비극은 “권력과 법은 신뢰를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조선 정부는 그렇다고 믿었지만
저화의 실패는 이 믿음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명백히 증명했습니다.
권력은 복종을 강제할 수는 있지만, 마음속의 믿음까지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저화 정책은 규제의 역설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경제를 안정시키려던 선한 의도는
오히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고 상업을 위축시키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정책 입안자들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더라도, 시장의 자생적 질서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규제는
결국 파국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무서운 교훈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저화의 실패는 모든 규제가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규제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게 만듭니다.
좋은 규제는 시장의 현실을 존중하고
신뢰를 기반으로 하며 유연하고 예측 가능해야 합니다.
저화의 비극은 나쁜 규제가 어떻게 한 국가의 경제를 수렁에 빠뜨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반면교사입니다.
조선판 양적완화의 비극적 결말
저화 발행은 현대의 양적완화나 재정의 화폐화와 원리가 같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통화 정책은 독립적인 중앙은행과 같은
엄격한 통제 장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화폐를 발행하는 주체와 돈을 쓰는 주체가 동일했습니다.
정부는 재정이 부족할 때마다 아무런 제약 없이 돈을 찍어 쓸 수 있는
막강한 발권력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는 발권력이 독립적인 기관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남용될 때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정부의 무분별한 발행은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저화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폭락했습니다.
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전조와 매우 유사한 현상이었습니다.
결국 정부의 무분별한 화폐 발행은
가장 보호받아야 할 서민들의 부를 약탈하여
국가의 재정 구멍을 메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인플레이션 조세의 가장 폭력적인 형태였습니다.
왕의 실패인가, 시스템의 부재인가?
저화의 실패를 단순히 태종이라는 한 군주의 아집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평가일 수 있습니다.
그의 의도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지
백성을 수탈하려는 악의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저화의 비극은 한두 명의 지도자 개인의 실패라기보다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구조적인 어려움과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저화 실패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지도자 개인의 역량보다는 시스템의 부재에서 찾아야 합니다.
현대의 명목화폐 시스템은 중앙은행의 독립성, 예금자 보호 제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정교한 제도들로 뒷받침됩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시스템이 전무했습니다.
저화의 신뢰는 오직 왕 개인의 권위라는 단 하나의 기둥에 위태롭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화의 실패는 좋은 의도를 가진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뒷받침할 견고하고 예측 가능한 시스템이 없다면
거대한 실패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