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프랑스 파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귀족 부인들은 마부와 하녀에게 무릎을 꿇고 투자의 비법을 물었고 평범한 시민들은
하룻밤 사이에 백만장자가 되는 꿈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미시시피 회사라는 이름의 주식과 그것을 설계한 한 명의 천재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존 로 입니다.
도박사이자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자이며 동시에 시대를 앞서간 비범한 금융가였습니다.
그는 텅 비어버린 프랑스의 국고를 종이돈과 주식이라는 마법으로 채워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가 만든 거대한 꿈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의 끝은 파멸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거대한 금융 버블은 한 나라의 경제를 송두리째 무너뜨렸고 사람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해프닝이 아닙니다.
인간의 탐욕과 공포 그리고 집단적 광기가 어떻게 금융 시스템을 집어삼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강력하고 시대를 초월한 경고입니다.
존 로가 쏘아 올린 탐욕의 불꽃이 어떻게 프랑스 전체를 태운 거대한 불길이 되었는지 그 생생한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모든 비극의 시작: 천재 금융가 존 로의 등장
칼과 카드로 단련된 승부사
모든 거대한 비극의 중심에는 비범한 인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시시피 버블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설계자 존 로는 스코틀랜드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평범한 삶을 거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그의 비상한 두뇌는 학문이 아닌 런던의 도박판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카드 게임의 확률을 꿰뚫어 보며 막대한 돈을 벌었고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불같은 성격과 거침없는 행동은 결국 그를 파멸 직전으로 몰고 갔습니다.
한 여성을 둘러싼 경쟁자와의 결투에서 상대를 칼로 찔러 살해한 것입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런던의 악명 높은 감옥에 갇혔지만 특유의 대담함과 치밀함으로
탈옥에 성공하여 유럽 대륙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합니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시작부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습니다.
칼과 카드로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경험한 그의 승부사적 기질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함은
훗날 그가 한 국가의 경제를 걸고 벌이는 거대한 도박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금융적 깨달음
유럽을 떠돌던 존 로의 발길이 멈춘 곳은 당시 세계 금융의 심장부였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가 어떻게 수많은 개인의 자본을 모아 거대한 부를 창출하는지,
그리고 그 회사의 주식이 거래소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며 경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지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는 또한 금과 은의 실물 이동 없이 장부상의 거래만으로 거대한 자금이 오가는 은행 시스템의 효율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존 로는 돈의 본질에 대한 혁명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는 돈의 가치가 반짝이는 금속 덩어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교환하고
가치를 저장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신용이라는 무형의 약속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이는 시대를 수백 년 앞서간 통찰이었습니다.
그는 금이나 은의 보유량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가 신용을 바탕으로 종이돈을 발행하면 상업을 활성화하고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 아이디어는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대한 야망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의 잉태
암스테르담에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존 로는 자신의 금융 시스템 구상을 실현할 무대를 찾아 유럽 전역을 누비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러 왕국의 군주들을 만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열정적으로 설파했습니다.
국가가 보증하는 은행을 세워 종이돈을 발행하고 이를 통해 국가의 막대한 부채를 해결함과 동시에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너무나도 대담하고 혁신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주들은 그의 제안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하며 거절했습니다.
살인 전과가 있는 정체불명의 도박사에게 나라의 경제를 맡길 만큼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금융 철학을 담은 책 화폐와 무역 고찰을 펴내며 자신의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었고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위험한 도박에 국가의 운명을 걸어볼 만한 절박한 통치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은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가 남긴 파산 직전의 왕국 프랑스였습니다.
절망에 빠진 왕국 프랑스
태양왕이 남긴 텅 빈 금고
18세기 초 프랑스는 겉보기에는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72년간의 긴 통치 기간 동안 이룩한 문화적 영광과 군사적 위업은 유럽 전역을 압도했습니다.
화려함의 극치인 베르사유 궁전은 모든 군주들의 부러움을 샀고 프랑스어는 유럽 상류층의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눈부신 영광의 이면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수십 년간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그 비용은 모두 국가의 빚으로 남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의 국가 부채는 한 해 세금 수입의 몇 배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고 국고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습니다.
금과 은이 유일한 돈이었던 시대에 이 막대한 빚은 프랑스 경제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와 같았습니다.
시중에는 돈이 돌지 않았고 상업은 마비되었으며 사람들은 가난과 절망에 시달렸습니다.
태양왕이 남긴 것은 빛나는 유산이 아니라 파산 직전의 거대한 부채 왕국이었습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재정 위기
루이 14세의 뒤를 이어 어린 증손자 루이 15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조카인 오를레앙 공이 섭정으로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파산 직전의 국가를 물려받아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했습니다.
통용되는 금화와 은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려 빚의 실질 가치를 줄이려 하거나 부자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오히려 경제에 혼란만 가중시키고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의 극심한 반발만 불러일으켰습니다.
국가의 신용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새로운 빚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세금을 걷어야 할 관리들은 부패했고 경제는 활력을 잃어 세수 기반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마치 거대한 난파선처럼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고 선장인 섭정은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프랑스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존 로와 같은 외부의 이단아에게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하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구원자로 나타난 이방인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존 로가 섭정 오를레앙 공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다른 재정가들처럼 세금을 더 걷거나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프랑스가 가진 막대한 부채를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원재료로 바꾸어 놓겠다는 마치 연금술과도 같은 대담한 제안을 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면서도 매혹적이었습니다.
금과 은이 부족하다면 종이로 돈을 만들면 되고 흩어져 있는 국가의 빚을
하나의 주식회사 주식으로전환하여 그 가치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절박한 심정의 섭정은 결국 이 이방인 도박사의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제안에 프랑스의 미래를 걸어보기로 결심합니다.
절망의 끝에서 프랑스는 가장 위험한 도박을 선택한 것입니다.
‘시스템’의 설계: 부채를 부로 바꾸는 마법
1단계: 신용 화폐의 발행, 방크 제네랄
존 로가 구상한 거대한 금융 시스템의 첫 번째 주춧돌은 바로 은행이었습니다.
그는 1716년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받아 방크 제네랄이라는 민간 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이 은행의 핵심 기능은 금화나 은화와 언제든지 1대1로 교환을 보증하는 지폐를 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정부가 재정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금속 화폐의 가치를 멋대로 바꾸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부가 발행하는 금속 화폐조차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존 로의 은행은 지폐의 가치를 교환 시점의 은화 가치에 고정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안정성에 대한 믿음을 주었습니다.
무거운 금속 주화를 들고 다닐 필요 없이 가볍고 편리한 지폐로 거래할 수 있게 되자 상인들은 크게 환영했습니다.
존 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섭정을 설득하여 정부가 모든 세금을 이 은행의 지폐로만 받도록 했습니다.
이는 지폐의 공신력을 국가가 보증해주는 효과를 낳았고 방크 제네랄의 신뢰도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은행은 국립은행인 방크 루아얄로 승격되며 프랑스 최초의 중앙은행이자 존 로가 설계한 시스템의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 역할을 하게 됩니다.
2단계: 부채의 주식화, 미시시피 회사
은행을 통해 안정적인 화폐 시스템의 기반을 닦은 존 로는 다음 단계로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국가 부채 문제에 칼을 댔습니다.
그의 해법은 놀라웠습니다.
그는 1717년 서방 회사라는 이름의 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훗날 미시시피 회사로 더 잘 알려지게 됩니다.
존 로는 정부에 돈을 빌려주고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국채를 들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 국채를 이 새로운 회사의 주식과 교환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국가에 대한 채권을 미래가 불투명한 민간 회사에 대한 지분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제안이었지만 여기에는 존 로의 교묘한 함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미시시피 회사가 프랑스의 광활한 북미 식민지인 루이지애나 지역의 무역을 독점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서 생산될 담배, 비단, 그리고 상상 속의 금과 은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할 것이라는 환상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가망 없는 채권을 손에 쥐고 있느니 미래의 대박을 꿈꿀 수 있는 주식을 갖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3단계: 독점과 합병을 통한 거대 기업의 탄생
존 로는 미시시피 회사의 가치를 더욱 극대화하고 사람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은행에서 나온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아프리카 무역을 독점하던 세네갈 회사,
아시아 무역을 담당하던 동인도 회사와 중국 회사를 차례로 합병했습니다.
이로써 미시시피 회사는 프랑스의 모든 해외 무역을 독점하는 전무후무한 거대 기업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그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 정부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조세 징수권과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권리까지 사들였습니다.
이제 미시시피 회사는 단순히 무역 회사가 아니라 세금을 걷고 돈을 찍어내는, 사실상 프랑스 경제 그 자체와 동일시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미시시피 회사의 성공은 곧 프랑스 국가의 성공을 의미하게 되었고
이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은 곧 애국적인 행위이자 부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믿음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존 로가 설계한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광기의 시작: 루이지애나의 황금빛 환상
지도 위에만 존재하는 엘도라도
존 로의 정교한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계속해서, 그리고 기꺼이 더 높은 가격에 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할 강력한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존 로가 찾아낸 그 이야기는 바로 미지의 땅 루이지애나였습니다.
당시 루이지애나는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실제로는 늪과 원시림으로 뒤덮인 척박한 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존 로는 대대적인 선전과 홍보 활동을 통해 이 땅을 황금과 보석이 강가에 굴러다니고
원주민들은 순박하며 비옥한 토지가 끝없이 펼쳐진 지상낙원, 즉 새로운 엘도라도로 완벽하게 포장했습니다.
파리의 거리에는 루이지애나의 풍요로운 자연과 친절한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을 환영하는 모습이 담긴 환상적인 그림과 포스터가 나붙었습니다.
사람들은 곧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한 주 사는 것이 이 새로운 낙원의 막대한 부를 나누어 갖는 입장권을 사는 것과 같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현실이 아닌 환상이 주식의 가치를 결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래의 이익을 현재로 끌어오는 마법
미시시피 버블을 포함한 모든 금융 버블의 본질은 미래의 불확실한 이익에 대한 기대를
현재의 자산 가격에 미리 반영시키는 데 있습니다.
존 로는 이 원리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천재였습니다.
사람들은 미시시피 회사가 지금 당장 얼마를 벌고 있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언젠가 루이지애나에서 황금과 담배를 실은 배가 파리로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주가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폭등할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뿐이었습니다.
즉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 자체가 다시 주가를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현대 금융 시장에서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술주에 대한 투자가 기업의 실제 수익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현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존 로는 300년 전에 이미 미래의 꿈을 팔아 현재의 부를 창출하는 금융의 마법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은행 대출이 불어넣은 거품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투기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름 아닌 존 로 자신이 통제하는 국립은행 방크 루아얄이었습니다.
그는 주식 투자 열풍을 더욱 가속화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담보로 아주 낮은 이자에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빌린 돈으로 다시 미시시피 주식을 샀고 올라간 주식을 담보로 더 많은 돈을 빌려 또 주식을 샀습니다.
이것이 바로 레버리지 투자의 원형입니다.
자기 돈이 거의 없어도 빚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빚을 내서라도 이 광란의 잔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은행이 공급하는 값싼 돈이 버블을 키우는 연료 역할을 한 것입니다.
돈이 돈을 낳고 주가가 주가를 끌어올리는 이 거대한 피드백 루프는 시스템 전체를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백만장자의 탄생과 뒤바뀐 세상
벼락부자들의 거리, 캥캉푸아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파리는 순식간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로 들끓는 거대한 투기장으로 변했습니다.
이 광기의 중심지는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 거래가 이루어지던 캥캉푸아라는 이름의 좁은 거리였습니다.
이 거리는 프랑스 전역은 물론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투자자들로 매일 발 디딜 틈 없이 붐볐습니다.
귀족, 성직자, 상인, 하인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전 재산을, 심지어 미래까지 걸고 주식 투기에 뛰어들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마부가 콧대 높은 귀족보다 더 큰 부자가 되고, 부엌에서 일하던 하녀가 주인마님에게 투자 비법을 가르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프랑스의 엄격한 신분 질서가 돈이라는 새로운 권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캥캉푸아 거리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혼란스럽고도 역동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밀리오네르’라는 신조어
바로 이 시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밀리오네르(millionaire)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이는 ‘백만 리브르 이상의 자산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로,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부의 계층이 탄생했음을 의미했습니다.
전통적인 부의 척도였던 토지나 세습 재산 없이도 오직 종이로 된 주식을 사고파는 것만으로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돈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송두리째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는 더 이상 성실하게 일하거나 대대로 물려받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대담한 베팅을 통해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사회 전체의 가치관을 뒤흔들었습니다.
사회 전체를 휩쓴 투기 열풍
투기 열풍은 단순한 경제 현상을 넘어 사회 전체를 집어삼킨 거대한 광기였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밭을 갈지 않았고 장인은 망치를 내려놓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과 귀는 오직 캥캉푸아 거리의 주식 시세판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모든 대화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주식을 사서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자신이 산 주식을 더 비싼 값에 사줄
‘더 큰 바보’가 항상 존재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만이 파리의 거리를 지배했습니다.
존 로가 설계한 것은 단순한 금융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탐욕을 무한히 증폭시키는 거대한 사회적 장치였던 셈입니다.
존 로, 프랑스의 경제 대통령이 되다
절대 권력의 정점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이 모든 것을 설계한 존 로의 위상 역시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1720년 1월 프랑스의 재무총감 자리에 오릅니다.
이는 오늘날의 재무부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그리고 경제기획원 장관을 합친 것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이제 프랑스의 화폐 발행, 모든 세금 징수, 국가 부채 관리,
그리고 해외 무역에 관한 모든 실권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경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프랑스 경제 전체가 움직였고 그의 저택 앞에는 그의 환심을 사서
투자 정보를 얻으려는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매일같이 장사진을 쳤습니다.
한때 사형수이자 도망자였던 이방인이 불과 몇 년 만에 한 나라의 경제를 손아귀에 쥔 절대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국왕을 넘어선 권력자
당시 존 로가 누렸던 권력은 어린 국왕 루이 15세나 그를 신임했던 섭정 오를레앙 공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국왕과 섭정조차 재정 문제에 있어서는 존 로의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스템이 프랑스를 고질적인 부채의 늪에서 구해낼 뿐만 아니라
경쟁국인 영국과 네덜란드를 뛰어넘는 유럽 최강의 경제 대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단순히 빚을 갚는 수준을 넘어, 금속 화폐에 얽매여 있던
구시대의 경제 구조를 신용 화폐 기반의 역동적인 자본주의 경제로 바꾸려는 거대한 문명사적 실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프랑스를 구원할 메시아로 숭배했고 그의 초상화는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시스템에 내재된 치명적 결함
하지만 그의 화려한 성공과 절대 권력 뒤에는 시스템 자체에 내재된 치명적인 결함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존 로의 시스템은 오직 주가와 지폐 가치가 계속해서 상승한다는 비이성적인 기대감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거대한 사상누각이었습니다.
즉 거품이 꺼지고 사람들의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운명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자신이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동시에 시스템을 통해 가장 큰 부를 축적한 최대 수혜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는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주가 하락은 곧 자신의 파산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브레이크가 고장 난 마차처럼 위험한 질주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더욱더 많은 돈을 찍어내고 더욱더 허황된 약속을 남발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거품의 이면: 실체 없는 약속
황금 대신 늪과 질병뿐인 땅
파리가 투기 열풍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안 그 모든 광기의 근거가 되었던 루이지애나의
현실은 사람들의 장밋빛 환상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존 로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선전했던 루이지애나는
사실 덥고 습한 기후와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이 들끓는 척박한 늪지대였습니다.
존 로는 이 식민지를 개발하기 위해 이주민을 보내야 했지만 아무도 그곳으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독일과 스위스 등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허위 광고로 유혹했고 심지어 파리의 거리에서
부랑자나 경범죄자들을 강제로 잡아들여 쇠사슬에 묶은 채 배에 태워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대부분은 낯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굶주림과 질병으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루이지애나에는 황금은커녕 생존조차 보장되지 않는 절망과 죽음만이 존재했습니다.
가짜 광산과 조작된 소문
존 로와 미시시피 회사는 루이지애나의 끔찍한 실상을 감추고 투자자들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루이지애나에서 거대한 금광과 은광이 발견되었다는 가짜 뉴스를 조직적으로 퍼뜨렸습니다.
파리의 거리에서는 마치 루이지애나에서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금과 은 덩어리를 가득 실은 수레가 요란하게 행진하는 쇼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소수의 원주민들을 파리로 데려와 마치 자신들이 다스리는 왕국의 왕자들인 것처럼 소개하고
그들이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과 부를 약속했다는 연극을 꾸미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고 주가를 계속해서 부양하기 위한 정교하게 조작된 거짓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보려 하지 않았고 보고 싶은 환상만을 믿었습니다.
신뢰의 균열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통제하려 해도 진실은 언젠가 새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루이지애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끔찍한 현실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파리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몇몇 현명하고 냉철한 투자자들은 미시시피 회사가 막대한 배당금을 약속하면서도
실제로는 무역을 통해 거의 아무런 수익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미시시피 주식의 가치가 회사의 실질적인 가치가 아닌 오직 대중의 막연한 기대감이라는 거품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신뢰라는 이름의 거대한 댐에 작지만 치명적인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균열은 곧 댐 전체를 무너뜨릴 거대한 붕괴의 시작점이 될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경고 신호들
현명한 자들의 탈출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광란의 파티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사람들은 시장의 생리를 잘 아는 소수의 현명한 투자자들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은행가였던 리처드 캉티용과 같은 인물들은 버블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 판단하고 보유하고 있던 미시시피 주식을 조용히 그리고 대량으로 팔아치웠습니다.
그들은 주식을 팔아 얻은 막대한 양의 종이돈을 즉시 가장 안전한 자산인 금과 은으로 바꾸어 마차에 싣고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 거대한 거품이 터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예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부자들과 현명한 투자자들의 매도 움직임은 시장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수면 아래에서 시스템을 뒤흔드는 미묘하지만 강력한 불안감의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종이돈에서 금으로
투기를 통해 막대한 부를 거머쥔 사람들조차 자신의 재산이 한낱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부는 회사의 실체가 아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대중의 신뢰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안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가장 확실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실물, 즉 금과 은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존 로가 운영하는 방크 루아얄에는 지폐를 금화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금 준비고에 엄청난 압박을 주기 시작했으며
이는 존 로의 신용 화폐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가 공격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위험 신호였습니다.
존 로의 강압적인 조치
시스템의 균열을 감지한 존 로는 신뢰를 회복시키기 위한 합리적인 조치를 취하는
대신 자신의 절대 권력을 이용한 강압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억누르려 했습니다.
그는 1720년 초 금화와 은화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하고 모든 거래를 오직 지폐로만 하도록 강제하는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심지어 한 개인이 일정 금액 이상의 금화를 소지하는 것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어긴 사람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겠다며 사람들의 집을 수색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습니다.
이는 시장의 신뢰를 회복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정부가 발행한 종이돈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불안감은 공포심으로 바뀌었고 그의 강압적인 조치는 시스템이 자유로운 신뢰가 아닌
국가의 폭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폭로하며 붕괴를 더욱 재촉하는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인플레이션의 습격
넘쳐나는 종이돈
주식 시장의 거품은 필연적으로 실물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존 로는 하락하는 주가를 방어하고 사람들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통제하는 방크 루아얄을 동원해
시장에 나온 미시시피 주식을 되사주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문제는 그 주식을 사들일 돈을 새로 찍어낸 지폐로 충당했다는 점입니다.
주가가 불안할 때마다 인쇄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갔고 이는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량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돈이 너무나도 흔해지자 돈의 가치는 자연스럽게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정부가 보증하는 종이돈의 가치를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손에 쥔 지폐가 내일이면 반 토막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회 전체에 만연했습니다.
치솟는 물가, 고통받는 서민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빵, 고기, 포도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필품 가격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몇 배씩 폭등했습니다.
이러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특히 봉급을 받는 노동자나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은퇴자처럼
고정된 수입으로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실질 소득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평생 모은 저축은 하룻밤 사이에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부동산이나 귀금속 같은 실물 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자산 가치가 상승하는 효과를 누렸습니다.
이는 극심한 부의 불평등을 낳고 사회 계층 간의 갈등을 폭발적으로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리다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은 존 로가 설계한 시스템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그의 시스템은 지폐의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사회적 신뢰 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지폐를 저축하거나 자산으로 보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월급을 받거나 물건을 판 돈이 생기면 그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빨리 실물 자산이나 생필품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이는 화폐가 더 이상 가치 저장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금융 시스템 전체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마지막 경고등이었습니다.
신뢰의 붕괴: 결정적인 한 방
주가와 화폐 가치의 강제 인하
커져가는 불안감과 통제 불능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존 로는 부풀어 오른 버블을 연착륙시키기 위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 조치는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사람들의 희미한 믿음마저 완전히 박살 내고 공포심에 불을 지피는 결정타가 되고 말았습니다.
1720년 5월 21일 그는 섭정을 설득하여 미시시피 주식의 공정 가격을 점진적으로 절반 수준까지 낮추고
시중에 유통되는 지폐의 가치 역시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충격적인 법령을 발표합니다.
그는 이 외과 수술과 같은 조치를 통해 과도하게 부풀려진 거품을 서서히 제거하고 시스템을 안정적인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정부가 공식적으로 주식과 화폐가 실제 가치보다 두 배나 부풀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꼴이었습니다.
기대감이 공포로 바뀌는 순간
이 발표는 시장에 그야말로 핵폭탄과 같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정부의 말을 믿고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제 정부가 나서서 자신들의 자산 가치를 반 토막 내겠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미래의 부에 대한 장밋빛 기대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주식과 지폐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처분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은행과 거래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탐욕이 아닌 오직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공포뿐이었습니다.
존 로가 그토록 공들여 쌓아 올렸던 신뢰의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대중의 분노와 폭동
존 로의 조치는 즉각적으로 격렬한 대중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그의 정책을 사기라고 비난하는 벽보가 파리 시내 곳곳에 나붙었고
전 재산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한 성난 군중이 그의 집과 방크 루아얄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구원자로 칭송받으며 가는 곳마다 환호를 받던 그는 이제 모든 문제의 원흉이자 공공의 적으로 전락했습니다.
귀족들마저 등을 돌렸고 그의 신변은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섭정 오를레앙 공은 대중의 압력에 굴복하여 불과 며칠 만에 이 조치를 철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신뢰라는 유리그릇은 한번 깨지면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존 로와 프랑스 전체가 뼈아프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대폭락: 탐욕의 종말
공포의 투매 사태
일단 신뢰가 무너지자 남은 것은 대혼란뿐이었습니다.
너도나도 손에 쥔 미시시피 주식을 한시라도 빨리 팔아치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주식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팔려는 사람만 넘쳐나자 주가는 그야말로 수직으로 낙하했습니다.
투기의 중심지였던 캥캉푸아 거리는 이제 희망의 함성이 아닌 절망의 비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서로 먼저 주식을 팔기 위해 아수라장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성난 군중에게 짓밟혀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전 재산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때 프랑스 전체를 사로잡았던 집단적인 탐욕은 이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집단적인 공포로 바뀌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휴지 조각이 된 주식과 지폐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1만 리브르를 호가하며 모두의 부러움을 샀던 미시시피 주식은
순식간에 액면가인 500리브르에도 미치지 못하는 휴지 조각으로 변했습니다.
존 로의 은행이 발행했던 지폐 역시 그 가치를 완전히 잃고 사람들은 다시 예전처럼 금화와 은화로만 거래하려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던 사람들은 다시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파리의 거리에는 전 재산을 날린 사람들의 절규가 가득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이어졌습니다.
한때 백만장자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듯했던 존 로의 시스템은
이제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 속에서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경제의 마비
금융 시스템의 완전한 붕괴는 프랑스 실물 경제에 즉각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신용이 사라지자 상거래는 마비되었고 투기 열풍에 휩쓸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던 기업들은 줄줄이 파산했습니다.
부유했던 귀족들은 담보로 잡혔던 토지를 잃고 하루아침에 몰락했으며 평생 모은 돈을 잃은 서민들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파탄 났습니다.
존 로가 국가의 부채를 국민의 부로 바꾸겠다던 거대한 마법은 결국 프랑스 경제 전체를 파멸로 이끈 끔찍한 저주가 되어버렸습니다.
프랑스는 이 상처를 회복하는 데 수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존 로의 도주와 시스템의 최후
프랑스에서 쫓겨난 경제 대통령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존 로는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변은 극도로 위험해졌고 성난 군중은 그를 찾아내어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했습니다.
한때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섭정 오를레앙 공조차도 더 이상 그를 보호해 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섭정은 존 로를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고 사실상 국외로 추방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한때 프랑스 경제의 절대 권력자였던 그는 이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야반도주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1720년 12월 그는 소수의 측근과 함께 아무도 모르게 국경을 넘어 브뤼셀로 도망쳤습니다.
프랑스를 구원하겠다던 그의 야심 찬 계획은 결국 자신의 비참한 도주극으로 막을 내리고 만 것입니다.
시스템의 공식적인 폐지
존 로가 떠난 후 프랑스 정부는 그가 남긴 거대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미시시피 회사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방크 루아얄은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정부는 시중에 풀린 엄청난 양의 주식과 지폐를 사들여 소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대한 부채가 남았습니다.
이 부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자산이 강제로 삭감되거나 몰수되었습니다.
존 로의 시스템은 공식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고 프랑스 경제는 깊은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의 실험은 결국 프랑스에 구원이 아닌 더 깊은 상처와 혼란만을 남긴 채 끝이 났습니다.
베네치아에서의 쓸쓸한 최후
프랑스에서 쫓겨난 존 로는 유럽의 여러 도시를 정처 없이 떠돌았습니다.
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여러 군주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금융 시스템을 제안했지만
이미 그의 평판은 땅에 떨어진 후였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과거에 도박으로 돈을 벌었던 도시 베네치아에 정착하여 남은 생을 도박으로 소일하며 쓸쓸하게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1729년 가난과 병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시스템이 원칙적으로는 완벽했으며
단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거나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한때 유럽 전체를 호령했던 천재 금융가의 최후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쓸쓸했습니다.
버블이 남긴 깊은 상처
금융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미시시피 버블의 붕괴는 프랑스 사회에 단순히 경제적인 손실 이상의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가장 큰 후유증은 바로 금융 시스템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주식, 은행, 그리고 특히 종이돈에 대해 극심한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과 신용보다는 손에 잡히는 금과 은 그리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땅만이 진정한 부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이후 프랑스의 금융 산업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경쟁국이었던 영국이 영란은행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국채 시장과 주식 시장을 발전시키며
산업 혁명의 자본을 축적해 나가는 동안 프랑스는 여전히 현물 경제와 소규모 개인 대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금융 발전의 격차는 이후 한 세기 동안 이어질 영국과 프랑스의 국력 차이를 결정짓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씨앗
더욱 중요한 역사적 영향은 미시시피 버블이 프랑스 혁명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입니다.
존 로의 시스템은 기존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버블 붕괴 이후 국가의 부채를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시켰습니다.
이후 프랑스 왕실은 만성적인 재정 위기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더욱 과도한 세금을 부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제3신분으로 대표되는 평민 계층의 불만을 극대화시켰습니다.
또한 버블 과정에서 부도덕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소수와 모든 것을 잃은 다수 사이의
극심한 불평등은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고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결국 이러한 불만들이 쌓이고 쌓여 1789년 인류의 역사를 바꾼 거대한 폭발 즉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만약 존 로의 금융 실험이 없었다면 프랑스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
미시시피 버블 사건은 3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강력하고 유효한 교훈을 줍니다.
이 사건은 기업의 실질적인 가치와 펀더멘털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오직 대중의 막연한 기대감과 비이성적인 탐욕만으로 자산 가격이 얼마나 위험한 수준까지 부풀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최초이자 가장 극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그 거품이 꺼졌을 때 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에 얼마나 끔찍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똑똑히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다르다’는 시장의 속삭임 속에서 역사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패턴을 반복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존 로의 실패라는 역사적 거울을 통해 현대 금융 시장의 위험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탐욕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존 로, 사기꾼인가 시대를 앞선 선구자인가
사기꾼이라는 비판
미시시피 버블의 주범인 존 로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역사적으로 그에게 가장 많이 붙는 꼬리표는 단연 희대의 사기꾼입니다.
비판자들은 그가 자신의 사적인 부와 권력을 위해 한 나라의 경제를 거대한 도박판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실체도 없는 루이지애나의 환상을 팔아 사람들을 현혹했고 자신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돈을 찍어내 인플레이션을 촉발했으며 결국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책임을 지지 않고 홀로 도망쳤습니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파산하고 목숨을 잃었으며 프랑스 경제는 수십 년간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파괴적인 결과를 고려할 때 그를 자신의 탐욕을 위해 국가를 기만한 거대한 사기꾼으로 보는 시각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선구자라는 재평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를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던 비운의 선구자로 재평가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가 주장했던 핵심 아이디어들 즉 금속 화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신용 화폐의 도입, 경제 안정을 위한 중앙은행의 필요성,
국가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여 경제 활력의 자본으로 삼는다는 발상 등은 오늘날 현대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개념들입니다.
그는 300년 전에 이미 현대 거시경제학과 금융공학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옹호론자들은 그의 이론 자체는 매우 혁신적이고 선구적이었으며 만약 그가 자신의 탐욕을 조금만 더 제어하고 절대 권력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좀 더 신중하게 시스템을 운영했다면 프랑스는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영국보다 먼저 금융 혁명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
결국 존 로에 대한 평가는 돈과 금융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금융 시스템의 본질과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금융은 과연 합리적인 이성의 영역인가 아니면 통제 불가능한 탐욕과 공포의 영역인가.
과연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거대한 금융 시스템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반복되는 위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존 로의 극적인 삶과 그의 시스템이 보여준 찬란한 성공과 비참한 실패는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는 천재성과 탐욕, 선구안과 무모함이 뒤섞인 금융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무대에 등장한 최초의 비극적 주인공이었던 셈입니다.
중앙은행의 역할과 책임
통화량 조절의 중요성
존 로가 만들었던 방크 루아얄은 사실상 프랑스 최초의 중앙은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강력한 권한을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블을 키우는 도구로 남용했습니다.
그는 경기 부양과 주가 부양이라는 단기적인 목표를 위해 무분별하게 통화량을 늘렸고 이는 결국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이라는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이 실패는 현대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중앙은행의 제1의 책무는 바로 통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물가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중앙은행은 단기적인 경기 부양이나 특정 산업 지원의 유혹에 빠지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돈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지키고 경제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든든한 닻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금융 시스템의 감독자
존 로의 은행은 단순히 돈을 찍어내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주식 담보 대출을 통해 주식 시장의 거품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중앙은행이 단순히 금리를 조절하는 통화 정책뿐만 아니라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 시스템 전반의 잠재적 위험을 종합적으로 감독하고 관리하는 ‘금융 안정’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함을 시사합니다.
특정 자산 시장의 가격 거품이 경제 전체에 미칠 수 있는 파급 효과를 미리 경고하고 금융 기관들의 과도한 위험 추구 행위를 사전에 억제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또 다른 중요한 책임입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바로 이 금융 안정 기능의 실패가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독립성과 투명성
존 로의 은행은 독립적인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섭정의 비호 아래 있었고 존 로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는 중앙은행이 정치적 압력이나 특정 이익 집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정부가 선거를 앞두고 무리하게 금리 인하를 요구하거나 특정 산업을 살리기 위해 부실 기업에 대한 구제 금융을 압박할 때 중앙은행은 장기적인 경제 안정을 위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중앙은행의 모든 정책 결정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어 시장 참여자들에게 명확한 신호를 주고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이러한 독립성과 투명성의 원칙들이 지켜질 때 중앙은행은 비로소 한 국가 경제의 든든한 파수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재정 건전성의 중요성
결국 존 로의 야심 찬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금융 기법이 아무리 혁신적이었다 하더라도
프랑스라는 국가의 근본적인 재정 건전성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존의 빚을 새로운 빚과 거품으로 덮으려 했을 뿐 세금 제도를 개혁하여 안정적인 세입 기반을 확보하고
왕실의 방만한 지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근본적인 개혁에는 실패했습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무리 정교하고 혁신적인 금융 기법이라도 국가의 펀더멘털 즉 지속 가능한 재정 구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존 로의 실패는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융 교육의 필요성
묻지마 투자의 위험성
미시시피 버블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금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묻지마 투자에 나섰다가 결국 파멸을 맞았습니다.
귀족부터 하인까지 그들은 존 로가 설계한 시스템의 복잡한 작동 원리나 루이지애나 식민 사업의 실질적인 가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늘보다 내일 주가가 더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옆집 사람이 주식으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문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심지어 빚까지 내서 맹목적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이는 금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유행이나 소문 그리고 탐욕에만 이끌려 투자하는 것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역사적인 사례입니다.
정보의 비대칭성
금융 시장에는 언제나 정보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정보의 비대칭성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합니다.
존 로와 미시시피 회사의 경영진 같은 내부자들은 시스템의 허구성과 잠재적 위험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장밋빛 환상과 조작된 정보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정보의 격차는 항상 일반 투자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며 내부자들이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위험을 대중에게 떠넘기는 금융 사기의 온상이 됩니다.
일반 투자자들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옥석을 가리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금융의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탐욕은 진화하는가
탐욕을 먹고 자라는 혁신
금융의 역사는 한편으로 혁신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혁신은 종종 인간의 탐욕을 더욱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복잡한 구조의 파생 상품, 컴퓨터 알고리즘에 기반한 초단타 매매
그리고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는 더 빠르고 더 은밀하게 더 큰 수익을 얻으려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낳은 산물입니다.
이러한 혁신은 분명 시장의 효율성을 높이고 자본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 구조와 위험을 완전히 이해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 리스크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탐욕은 기술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셈입니다.
역사로부터의 겸손
존 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금융 시장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적인 두뇌나 정교한 수학적 모델이라도 수많은 인간들의 비이성적인 심리가 얽혀 만들어내는
시장의 광기와 예측 불가능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금융이 가진 창조의 힘을 존중하고 활용하되
그것이 언제든 파괴적인 힘으로 돌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계심을 잃지 않기 위해 과거의 실패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2000년 전 로마 금융 위기와 토지 투기 거품 붕괴
- 소문이 돈이 되던 시대, 로마 포룸 : 탐욕과 군중심리 2000년 전의 작전주
- 튤립 한 송이가 집 한채? 네덜란드 투기광풍 튤립 버블
- 왕이 보증한 대박, 밀리언 어드벤처 : 17세기 런던 복권 열풍과 투기의 전염
- 철도 투기 광풍, 19세기 영국 버블의 시작과 끝
- 영국 남해회사 버블, 정부가 설계한 18세기판 묻지마 투기판의 비극
- 1820년대 라틴 아메리카 국채 버블과 포야이스 사기 사건
- 1929년, 월스트리트의 꿈이 무너지던 날
- 1987년 검은 월요일 : 정크본드 혁명과 저축 대출(S&L) 위기
-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 버블 경제 1980년대 일본 심층 탐구
- 닷컴 버블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왜 붕괴되었는가
- 금융 버블 : 존 로 미시시피 버블과 붕괴 그리고 사기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