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심장, 한양의 경제를 장악하라
이야기의 장대한 서막은 1392년, 500년 고려 왕조의 깃발이 내려지고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 조선을 열었던 격동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왕조는 새로운 수도를 필요로 했습니다.
오랜 논의 끝에 결정된 곳이 바로 한양, 오늘날의 서울입니다.
한양은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건국의 설계자였던 정도전과 같은 혁명가들의 치밀한 계산과 유교적 이상 아래,
완벽하게 계획된 인공 도시였습니다.
모든 것이 왕과 국가를 중심으로 설계된 도시에서, 백성들의 경제 활동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국가는 도시의 설계 단계부터 상업 활동이 이루어질 공간을 지정하고,
그 활동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한양의 상업이 왕의 발밑에서, 왕의 허락하에 이루어지는 활동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은 ‘농본억상’, 즉 농업을 근본으로 삼고 상업을 억제해야 한다는 사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땅과 곡식을 생산하는 농업이야말로 국가의 근간이자 신성한 활동이었습니다.
반면 상업은 직접 무언가를 생산하지는 않으면서,
단지 물건을 이리저리 옮겨 파는 것만으로 이익을 챙기는 천하고 부차적인 활동으로 치부되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거대한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이렇게 성장한 상인 계층이 잠재적으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깊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 의지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시전 상인’입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장사할 수 있는 ‘허가’를 국가로부터 받은 공식 상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허가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특권을 누리는 만큼, 왕실과 중앙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무거운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즉, 시전 상인들은 자유로운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상인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봉사를 통해 독점적 영업권을 보장받는 일종의 ‘어용상인’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육의전, 왕의 남자들이 된 상인들
수많은 시전 상점들 중에서도,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핵심 물품을 공급하는 여섯 종류의 상점은
다른 시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지위와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들을 바로 ‘육의전’이라 불렀습니다.
대체로 고급 비단(선전), 무명(면포전), 면직 비단(면주전), 종이(지전), 생선(어물전), 모시(저포전) 등을 취급하는 상점들이었습니다.
육의전은 단순한 상점을 넘어, 국가 경제의 대동맥과도 같은 존재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국가는 육의전에게 막중한 책임을 지운 대가로, 다른 상인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특권을 선물했습니다.
바로 자신들이 취급하는 상품에 대한 한양 도성 내에서의 ‘독점 판매권’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허가 없이 이러한 물건들을 몰래 파는 행위는 ‘난전’이라는 불법 행위로 간주되어 엄격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막강한 독점권 덕분에 육의전 상인들은 사실상 경쟁자가 없는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육의전이 가진 가장 무섭고 실질적인 무기는 바로 ‘금난전권’이라는 이름의 칼이었습니다.
이는 허가 없이 벌이는 불법 장사인 ‘난전’을 육의전 상인들이 직접 단속하고 금지할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국가가 행사해야 할 사법권의 일부를 사적인 이익 집단인 상인에게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육의전 상인들은 난전 상인들을 붙잡아 관아에 넘기고, 물건을 빼앗으며, 가게를 부수는 행위까지 합법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는 시장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듯 상인에게 다른 상인을 단속하는 칼을 쥐여준 셈입니다.
평화의 시대, 꿈틀대는 욕망의 시장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고, 17세기 후반부터 조선 사회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인구의 증가’였습니다.
특히 수도 한양은 18세기 이르러 30만 명에 육박하는 거대한 소비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늘어난 사람들은 더 좋은 옷, 더 맛있는 음식, 더 편리한 물건을 원했습니다.
소비에 대한 대중적 욕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입니다.
또한,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시장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고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양이라는 거대 도시의 폭발하는 소비 수요를, 국가가 허가한 육의전과 몇몇 시전 상인들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육의전 상인들은 독점적 지위에 안주하며, 오히려 공급량을 조절하여 높은 가격을 받아내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사고자 하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팔고자 하는 사람은 부족한 이 불균형 상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새로운 공급자를 불러들이는 가장 강력한 신호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시장의 절박한 부름에 응답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난전’입니다.
국가의 허가 없이, 법의 테두리 밖에서 활동하는 이 불법 상인들은 육의전이 채워주지 못하는 시장의 빈틈을 정확히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은 종로를 벗어나 이현이나 칠패 같은 뒷골목에서 좌판을 벌이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난전 상인이 되어, 육의전이 독점하던 물건을 몰래 구해와
더 싼값에 팔았고, 온갖 신기하고 다양한 물건들을 선보였습니다.
소비자들은 당연히 불친절하고 비싼 육의전 대신, 활기 넘치고 값싼 난전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규제의 칼날, 난전을 향하다
자신들의 독점적 이익이 줄어들자, 육의전 상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국가가 부여한 가장 강력한 무기, 금난전권을 본격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육의전 상인들은 집단으로 조정에 상소를 올려 난전의 불법성을 맹렬히 고발하고,
이들을 뿌리 뽑지 않으면 국가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정부는 국역의 안정적인 확보를 중시했기에 그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비호 아래, 육의전의 난전 단속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육의전은 사적으로 고용한 단속반을 운영하여, 난전이 벌어지는 시장을 급습하고 상인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했습니다.
난전 상인들이 팔던 물건은 모조리 빼앗겼고, 좌판이나 가게는 인정사정없이 부서졌습니다.
국가는 시장의 안정을 위해 상인에게 칼을 쥐여주었지만,
그 칼은 약한 자들을 짓밟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탐욕스러운 흉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단속이 난전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난전 상인들은 단속을 피해 더욱 교묘하고 은밀한 방법으로 진화했습니다.
고정된 장소 대신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장사하거나,
단속이 미치지 못하는 권력가의 집 담벼락 밑으로 숨어들어 보호를 받으며 장사를 계속했습니다.
이는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한 곳을 누르면 다른 곳에서 더 교묘한 형태로 터져 나오는 풍선 효과와 같았습니다.
법의 허점, 누가 진짜 불법인가?
금난전권은 원래 공적인 목적을 위해 부여된 권한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육의전 상인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독점 이익을 지키기 위한 폭력적인 수단으로 철저히 남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품목과 관련 없는 난전까지도 무차별적으로 단속했습니다.
육의전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한양 백성들의 마음은 육의전에서 더욱 빠르게 멀어졌습니다.
독점에 안주한 육의전 상인들은 거만하고 불친절했으며, 물건 값은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반면, 난전 상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친절했고, 가격을 흥정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소비자들은 당연히 인간적인 정이 있고 선택의 폭이 넓은 난전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단속이 심해지자, 흩어져 활동하던 난전 상인들은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조합인 ‘계’나 ‘도’를 만들고, 공동으로 자금을 모아 육의전의 단속반에 맞섰습니다.
이제 싸움은 ‘합법 상인 vs 불법 상인’의 구도를 넘어, ‘육의전 조직 vs 난전 조직’이라는 거대한 이권 다툼으로 번져나갔습니다.
국가의 불공정한 규제가 오히려 시장의 폭력성과 조직화를 부추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가격 통제, 선의의 규제가 시장을 망치다
조선 정부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물가 안정’이었습니다.
정부는 시장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격 상한제’, 즉 특정 물건을 정해진 가격 이상으로
팔지 못하게 법으로 강제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는 당장 물가 상승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한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시장 가격을 억지로 억누르자, 상인들은 “밑지고 팔 수는 없다”며 아예 물건을 시장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시장에서는 품귀 현상이 벌어졌고,
공식 시장 밖에서는 암거래를 통해 훨씬 더 비싼 가격에 상품이 거래되는 암시장이 번성했습니다.
가격 통제는 공급자들의 생산 및 유통 의욕을 근본적으로 꺾어버려,
오히려 시장의 공급 자체를 위축시키는 ‘규제의 역설’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육의전 상인들은 교묘한 이중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겉으로는 정부의 가격 통제 정책에 따르는 척했지만, 뒤로는 좋은 품질의 물건을 몰래 빼돌려 암시장에서 비싸게 팔아넘겼습니다.
결국, 백성을 위해 시작된 물가 안정 규제가 시장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정직한 상인과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며,
교활한 육의전의 배만 불리는 최악의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신해통공, 정조의 칼끝은 어디를 향했나
18세기 후반, 개혁 군주 정조가 등장합니다.
정조는 당시 한양의 경제가 육의전이라는 소수 독점 세력의 횡포로 인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고 정확히 진단했습니다.
그는 낡고 경직된 독점 규제가 오히려 시장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고,
소수에게만 부당한 이익을 안겨주는 불공정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개혁의 칼끝은 이제 부패하고 비대해진 ‘허가받은 독점 세력’, 바로 육의전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1791년, 정조는 조선 상업의 역사를 바꾸는 혁명적인 조치, ‘신해통공’을 단행합니다.
핵심 내용은 수백 년간 육의전이 독점적으로 행사해왔던 금난전권을 대폭 축소하거나 완전히 폐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국가가 육의전 이외의 모든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이나 다름없는 역사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육의전 여섯 곳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완전히 폐지했고,
육의전의 금난전권조차도 도성 내 특정 구역을 벗어난 곳에서는 행사할 수 없도록 크게 제한했습니다.
이제 난전 상인들은 더 이상 육의전의 폭력적인 단속에 무방비로 당하지 않고,
정해진 구역 안에서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규제의 역설, 독점을 없애니 시장이 살아났다
신해통공이라는 혁명적인 규제 완화 조치가 실시되자,
오랫동안 독점의 그늘 아래 신음하던 한양의 시장은 눈에 띄게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수백 년간 억압받던 수많은 난전 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면서,
시장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값싼 물건들로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자의 선택권이 획기적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가장 큰 변화를 맞은 것은 바로 육의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독점적 지위라는 안락한 온실 속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자신들이 그토록 멸시했던 난전 상인들과 ‘경쟁’해야만 했습니다.
독점이라는 인위적인 장벽이 사라지자, 비로소 시장은 ‘경쟁’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스스로 효율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자유로운 경쟁은 자연스럽게 시장 전체의 물가 안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규제를 없앤 것이 그 어떤 강력한 규제보다 더 효과적으로 시장을 안정시키고 국가 경제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신해통공의 ‘통공’은 ‘막힌 것을 통하게 하여 모두가 함께 이익을 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조는 육의전의 독점이라는 낡은 규제가 조선 경제의 혈관을 꽉 막고 있는 ‘혈전’과 같다고 정확히 진단했고,
그 막힌 혈관을 과감하게 뚫어 피가 온몸 구석구석까지 원활하게 돌게 했습니다.
허가받은 독점, 그 태생적 한계
육의전의 400년 역사는 경쟁 없는 시장은 반드시 썩어 문드러진다는 경제학의 제1 원리를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국가로부터 독점이라는 완벽한 온실 속 보호를 받자, 육의전 상인들은 더 이상 혁신하거나 노력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독점적 환경은 필연적으로 상인들의 나태와 오만, 그리고 부패를 낳았습니다.
그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던 소비자들과, 활력을 잃어버린 국가 경제 전체에 전가되었습니다.
육의전 상인들은 자신들의 독점적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정의 고위 관리들과 끈끈하게 결탁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정경유착’과 그 본질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의 규제가 특정 집단에게만 과도한 이익을 몰아주는 구조일 때,
그 집단은 자신의 특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반드시 정치 권력과 손을 잡으려 합니다.
또한, 시장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매 순간 변화하고 성장하는데,
규제는 한번 만들어지면 쉽게 바뀌지 않는 돌덩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변화하는 시장의 속도를 낡은 규제가 따라가지 못할 때,
규제는 경제 발전을 돕는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발목을 잡는 심각한 장애물이 됩니다.
난전, 불법의 그늘에서 시장의 혁신을 이끌다
난전은 법의 눈으로 보면 불법이었지만, 시장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필연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낡은 공급 시스템에 만족하지 못했던 수많은 소비자들이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법의 잣대로 보면 그들은 범법자였지만, 경제학의 잣대로 보면 그들은 시대의 요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시장의 비효율성을 해결하려 했던 위대한 혁신가들이었습니다.
치열한 야생의 경쟁 환경에 놓인 난전은 시장 전체의 효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유통 경로를 개척했고, 독특한 디자인의 상품을 개발했으며, 인간적인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규제의 온실 속에 있던 육의전이 정체에 빠져 있는 동안,
규제 밖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난전은 시장 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었습니다.
정조의 신해통공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수십 년간 끈질기게 생존하며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 온
수많은 이름 없는 난전 상인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아래로부터의 시장 개혁을 위한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압력이었던 셈입니다.
때로는 법의 테두리 밖의 ‘불법적인’ 움직임이 역설적으로 사회를 더 건강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금난전권, 상인이 상인을 억압하는 모순
금난전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국가가 독점적으로 행사해야 할 ‘공권력’의 일부를
사적인 이익 집단인 상인에게 위임했다는 점입니다.
국가는 공정성과 공익을 기반으로 법을 집행해야 하지만,
육의전 상인들은 오직 자신들의 독점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이기적인 동기만으로 움직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단속은 공정한 법 집행이 아니라,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사적인 폭력 행사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의전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이 만들어지도록 끊임없이 로비를 펼쳤습니다.
이는 특정 이익 집단의 목소리가 마치 전체 시장의 목소리인 것처럼 포장되어,
국가의 정책 결정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형적인 규제 포획의 사례입니다.
육의전은 자신들의 무자비한 난전 단속 행위를 항상 ‘어지러운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포장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독점적 지배 질서’였습니다.
소비자, 발로 심판하다
조선의 절대 군주도, 막강한 정부도, 부와 권력을 누려온 육의전도 시장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시장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힘은 결국 이름 없는 수많은 소비자에게 있었습니다.
아무리 국가가 독점권을 부여하고 법으로 보호해 주어도, 소비자들이 외면하면 그 상점은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양의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발과 돈을 이용해 시장을 냉정하게 심판했습니다.
소비자들의 선택 기준은 명확하고 합리적이었습니다. 바로 가격, 품질, 그리고 다양성이었습니다.
육의전은 이 모든 기준에서 난전에게 패배했습니다.
소비자들은 단순히 물건만 산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난전을 보호했습니다.
난전이 사라지면 결국 그 피해가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돌아와,
다시 비싸고 불친절한 육의전의 횡포를 견뎌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상적 배경, 실학자들의 비판
18세기, 조선의 낡은 모순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실학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목격한 북학파 실학자들은 조선의 경제 시스템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수레가 다녀야 물건이 흐르고, 물건이 흘러야 시장이 산다”고 주장하며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낡은 규제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강력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그의 제자 박제가는 “재물은 우물물과 같아서 퍼서 쓸수록 채워진다”며 ‘소비의 중요성’을 파격적으로 역설했습니다.
또 다른 실학자 유수원은 ‘사농공상’의 직업적 차별을 비판하며, 상인과 기술자가 대접받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당대의 선각적인 실학자들이 제기했던 날카로운 비판과 구체적인 대안들은,
정조가 신해통공이라는 위대한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상적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신해통공, 그 후의 시장
1791년 신해통공이 발표되자, 시장은 거대한 지각 변동을 겪으며 잠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가장 격렬하게 반발한 세력은 당연히 하루아침에 특권을 빼앗기게 된 육의전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집단으로 가게 문을 닫는 ‘철시’를 감행하고, 정부를 협박하며 개혁에 저항했습니다.
모든 위대한 개혁은 이처럼 기존 질서에 안주해왔던 기득권의 필사적인 저항과,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기까지의 피할 수 없는 단기적인 혼란과 진통을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혼란의 파도가 지나간 후, 한양의 시장은 점차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며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유로운 경쟁이 보장되자, 소비자들은 더 좋은 품질의 물건을 더 싼값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혁신해야만 했던 육의전은 더 효율적인 상점으로 거듭나야 했습니다.
재능 있는 난전 상인들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마음껏 능력을 펼치며 새로운 부유층으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신해통공이 완전한 자유 시장 경제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고, 남겨진 과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방향성입니다.
신해통공은 국가의 인위적인 통제와 불공정한 독점에서 벗어나,
시장의 자율성과 자유로운 경쟁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역사적인 첫걸음이었습니다.
규제의 역설: 독점은 국가가 만들고, 경쟁은 시장이 만들었다
조선 정부는 시장을 안정시킨다는 선한 의도로 육의전이라는 독점 규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시장은 침체되고 왜곡되었으며, 이 강력한 규제는 오히려 더 거대하고 통제 불가능한
‘난전’이라는 지하 시장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선한 의도로 시작된 규제가 어떻게 정반대의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육의전의 사례는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줍니다.
정부는 난전을 시장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질서한 존재로 규정했지만,
진짜 시장의 무질서와 혼란은 소수의 상인에게만 독점적 특권을 몰아준 국가의 독점 규제 그 자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육의전과 난전의 길고 긴 전쟁에서 최종적인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궁극적인 승자는 바로 시장 그 자체와 시장의 주인인 소비자였습니다.
국가가 시장을 이기려 할 때가 아니라, 시장의 원리를 존중하고 잠재력을 풀어줄 때, 비로소 사회 전체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관치 경제의 한계, 시장의 힘을 믿지 못한 정부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관치 경제’,
즉 정부가 시장의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장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통제 불능의 혼란에 빠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수많은 개인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시장이 가진 자생적인 질서와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소수의 관료가 책상에 앉아 계획하는 것이,
수십만 명의 지혜가 모여 만들어내는
시장의 효율성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부가 시장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면 완벽한 정보가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정보의 비대칭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부의 개입은 필연적으로 비효율과 심각한 시장 왜곡을 낳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정부가 시장을 함께 가야 할 파트너가 아니라,
항상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성공적인 경제 정책은 시장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규제는 어떻게 기득권의 무기가 되는가
모든 규제는 그 탄생의 순간에는 대부분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의전 제도 역시 처음에는 공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규제는 원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육의전이라는 특정 집단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견고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규제가 한번 만들어지면, 그 규제를 통해 이익을 얻는 수혜 집단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고,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 규제가 영원히 유지되도록 저항합니다.
육의전의 독점권은 새로운 경쟁자들이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거대한 진입 장벽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먼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사람이, 다른 사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모든 개혁의 과정에는 이처럼 기존의 불합리한 제도를 통해 이익을 얻어왔던 기득권의 저항이라는 가장 험난한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정조의 성공은 그가 이러한 기득권의 거센 저항을 정면으로 뚫고 자신의 개혁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켰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200년 전의 시장 전쟁, 오늘을 말하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새로운 증기자동차가 등장하자,
기존 마차업자들의 반발로 자동차의 속도를 제한하고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걷게 하는 붉은 깃발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규제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육의전의 금난전권은 바로 이 ‘붉은 깃발법’의 조선 시대 버전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가 어떻게 국가의 혁신 잠재력을 갉아먹는지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