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것 같던 ‘광란의 2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휩쓸고 간 유럽은 잿더미 위에서 신음했지만
대서양 건너 미국은 역설적으로 황금기의 여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연합국에 군수물자와 자본을 공급하며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부상한 미국 경제는
지칠 줄 모르는 엔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죠.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젊은 세대는 과거의 엄격한 규율 대신 현재의 자유와 쾌락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사회 전반에 내일은 없다 오늘을 즐기자는 강렬한 낙관론을 퍼뜨렸습니다.
공장의 굴뚝은 번영의 연기를 뿜어냈고
도시의 밤은 재즈 클럽의 네온사인으로 밝혔습니다.
이처럼 전쟁의 상처 위에서 피어난 낙관과 풍요는 곧이어
미국 사회 전체를 집어삼킬 거대한 투기 광풍의
완벽한 심리적 무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은 단연 재즈와
플래퍼(flapper)로 불리는 신여성이었습니다.
라디오와 축음기를 타고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재즈의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리듬은
낡은 관습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했습니다.
금주법 시대의 불법 주점 스피크이지(speakeasy)는 젊은이들의 해방구였고
짧은 머리와 무릎 위로 올라온 치마를 입은 플래퍼들은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되었죠.
이러한 문화적 해방감은 소비에 대한 인식마저 바꾸어 놓았습니다.
근검절약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었고 최신형 자동차를 몰고 유행하는 옷을 입는 것이 성공과 세련됨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소비는 단순한 필요 충족을 넘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는 하나의 문화적 행위로 격상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더 많은 돈을 향했습니다.
더 화려하게 소비하고 더 자유롭게 즐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때마침 주식 시장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마법의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과거 소수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주식 투자가 대중적인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광란의 20년대가 만들어낸 사회·문화적 에너지는 고스란히 월스트리트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낙관에 찬 개인들의 욕망이 한데 모여 거대한 집단적 탐욕으로 변모하는 순간
미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위험한 파티의 막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기술 혁명이 쏘아 올린 신시대의 서막
자동차, 미국의 풍경을 바꾸다
20세기 초반의 기술 혁신 특히 자동차의 대중화는 미국의 풍경을 문자 그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 덕분에 자동차는 더 이상
소수의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었습니다.
도로가 전국적으로 깔리고 주유소와 정비소가 생겨나면서
미국인들은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이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죠.
이는 도시의 구조를 바꾸고 교외 지역의 발전을 촉진했으며
철강 석유 고무 등 연관 산업의 동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미국인들에게 자유와 진보 그리고 가능성을 상징하는 시대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술의 경이로운 발전을 보며
인류가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영원한 번영이 약속된
신시대(New Era)에 진입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라디오, 정보와 욕망을 증폭시키다
자동차와 더불어 라디오의 등장은 정보의 유통 속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전까지 수 주일이 걸려야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소식들이
이제는 수백만 명의 안방에 실시간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같은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며
하나의 거대한 국민적 동질감을 형성했죠.
이러한 정보 전달 방식의 변화는 금융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거 월스트리트의 전문가들만이 독점하던 주식 시세와 투자 정보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까지 생생하게 전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주식 투자에 대한 심리적 문턱을 크게 낮추는 동시에
특정 주식에 대한 소문과 열기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는 속도를 극적으로 단축시켰습니다.
자동차와 라디오로 대표되는 기술 혁신은 사람들에게
낡은 경제 법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강력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과거의 경제 위기나 불황은 이제 극복된 과거의 유물이며
과학적 경영과 기술의 진보가 끝없는 성장을 보장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죠.
이러한 신시대 철학은 곧이어 닥쳐올 투기 광풍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의 주가 상승이 단순한 거품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기술에 대한 맹신이 경제적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흐리게 만든 것입니다.
소비는 미덕, 미래를 빌려 쓰는 사람들
할부 판매, 욕망을 즉시 실현하다
대량생산 시대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어떻게 이 많은 물건을 팔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겨주었습니다.
기업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할부 판매라는 혁신적인 금융 기법을 제시했습니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목돈을 모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매달 일정 금액을 나누어 내는 방식으로 자동차 냉장고 세탁기와 같은
고가의 내구재를 즉시 소유할 수 있게 되었죠.
이는 사람들의 소비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혁명이었습니다.
미래의 소득을 담보로 현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더 이상 비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현명한 선택으로 여겨졌습니다.
미래의 나에게 빚을 내어 현재의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일상화된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짊어진 보이지 않는 빚
이러한 신용 소비의 확산은 미국 경제의 외형을 급격히 팽창시켰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사회 전체의 부채를 위험천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개인과 가계는 자신의 상환 능력을 초과하는 빚을 지는 데 무감각해졌고
기업들은 미래의 불확실한 수입을 근거로 과감하게 생산 설비를 늘렸습니다.
마치 거대한 카드 돌려막기처럼 사회 전체가
미래는 반드시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에 기대어
현재의 시스템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풍요를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풍요는 사실상 미래 세대의 주머니를 당겨쓴
보이지 않는 빚 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단 사고 지불은 나중에 하는 식의 소비 행태는
주식 시장의 투기 심리와 정확히 닮아 있었습니다.
할부로 자동차를 사는 사람이나 마진 융자로 주식을 사는 사람이나
모두 미래의 가치 상승에 베팅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할부금은 미래의 안정적인 소득으로 갚으면 되고
주식 투자 빚은 미래의 주가 상승으로 갚으면 된다는 논리였죠.
이처럼 소비 시장과 금융 시장 모두에서 미래를 담보로 현재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투기적 심리가 만연했습니다.
미국 사회 전체가 거대한 신용의 파도에 올라타 아슬아슬한 서핑을 즐기고 있었지만
그 파도가 언젠가는 부서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주식은 이제 안전하다는 새로운 믿음
위험 자산에서 안전 자산으로의 인식 전환
역사적으로 주식은 기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가치가 급변하는 위험 자산의 대명사였습니다.
따라서 주식 투자는 충분한 지식과 자본을 갖춘 소수의 전문가나
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투기꾼들의 영역으로 인식되었죠.
하지만 광란의 20년대는 이러한 해묵은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에드거 로런스 스미스와 같은 경제 분석가들은 방대한 과거 데이터를 분석하여
장기적으로 볼 때 주식 투자가 채권이나 부동산보다 훨씬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으며
인플레이션 위험을 방어하는 데도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대중에게 “주식은 장기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투자처”라는 새로운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투자의 민주화가 낳은 그림자
이 믿음은 주식 시장의 본질적인 위험성을 간과하게 만들었고
투자의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과거 월스트리트의 전유물이었던 주식 투자는 이제 구두닦이 이발사 가정주부 등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는 국민적인 재테크 활동이 되었죠.
증권사들은 전국 곳곳에 지점을 열고 초보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열을 올렸습니다.
이는 자본 시장의 저변을 넓혔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대부분의 신규 투자자들은 기업의 가치나 경제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단순히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주변의 소문에 의존해
묻지 마 투자에 나섰습니다.
시장은 합리적인 투자자보다 감정적인 군중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고
이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극도로 취약한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투자의 민주화라는 화려한 구호 뒤에는 시장의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초보 투자자들의 불안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미래의 가치를 현재로 끌어오는 마법
낡은 가치 평가 방식의 폐기
과거 주식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비교적 명확했습니다.
기업이 보유한 공장이나 토지 같은 실물 자산의 가치
그리고 현재 벌어들이고 있는 순이익과 배당금이 핵심이었죠.
하지만 기술 혁신으로 미래가 불확실하게 변하는 신시대에
이러한 낡은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투자자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실적보다는 라디오나 자동차 산업처럼
미래에 펼쳐질 무한한 성장 가능성에 베팅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지표로는 설명할 수 없는 높은 주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미래의 꿈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는 새로운 논리를 필요로 했습니다.
미래가치 할인법이라는 위험한 논리
새로운 시대의 투자자들은 미래가치 할인법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기업이 미래에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막대한 현금 흐름을
현재 가치로 할인하여 주가를 산정하는 방식입니다.
문제는 미래의 현금 흐름을 얼마로 추정하느냐에 따라
주가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죠.
투자자들은 장밋빛 상상력을 동원해 미래 수익을 터무니없이 부풀렸고 이를 근거로 현재의 높은 주가를 정당화했습니다.
RCA(라디오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와 같은 인기 기술주는
실제 벌어들이는 이익의 수백 배에 달하는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기업의 실체가 아닌 대중의 집단적인 환상과 기대감에 가격을 매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가치 평가는 현실과 괴리된 거대한 버블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으로 작동했습니다.
주가는 더 이상 기업의 현재 가치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투영하는 요술 거울이 되어버렸고
그 거울 속에는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탐욕의 이미지만이 가득했습니다.
중앙은행이 부채질한 유동성 파티
유럽을 위한 저금리, 미국을 위한 함정
1920년대 중반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신음하던 유럽
특히 영국 경제를 돕기 위해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미국으로부터 더 쉽게 돈을 빌리고
자국 통화 가치를 안정시키도록 돕는다는 명분이었죠.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미국 내부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낮은 금리로 인해 시중에 돈이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은행들은 대출 심사를 완화했고 기업과 개인은 싼 이자로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넘쳐나는 돈이 만들어낸 자산 인플레이션
은행에 돈을 넣어두어 봐야 이자가 얼마 되지 않으니
사람들은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곳 즉 주식 시장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연준의 선의는 결과적으로 투기라는 거대한 모닥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습니다.
시중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은 실물 경제의 성장 속도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갈 곳을 잃은 이 돈들은 부동산과 주식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자산 가격을 폭발적으로 밀어 올렸습니다.
물건이나 서비스의 가격이 오르는 일반적인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오직 자산의 가격만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자산 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식을 사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었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을 주식 시장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주가 상승이 다시 유동성을 끌어들이고
그 유동성이 다시 주가를 밀어 올리는 선순환 아닌 선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파티는 점점 더 화려해졌지만 그 파티의 비용은 보이지 않는 거품 속에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니까 평범한 사람들의 참전
월스트리트를 넘어 거실로 들어온 주식
과거 주식 투자는 뉴욕 월스트리트라는 특정 공간에 국한된 소수 전문가들의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광란의 20년대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라디오는 실시간 주식 시세를 안방까지 전달했고
신문은 주식으로 백만장자가 된 이웃의 이야기를 연일 대서특필했죠.
증권사들은 마치 백화점처럼 전국 곳곳에 화려한 객장을 열고 일반인 고객들을 유치했습니다.
고객의 방이라 불리는 객장은 주부 은퇴한 노인 젊은 직장인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투자를 논하는 사교의 장이 되었습니다.
뒤처질 수 없다는 공포(FOMO)
주식 투자는 더 이상 복잡하고 어려운 금융 활동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인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주식 투자로 돈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시장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만 이 거대한 부의 흐름에서 소외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뒤처지는 것에 대한 공포
(Fear Of Missing Out, FOMO)가 사회 전반에 만연했죠.
이러한 불안감은 사람들을 더욱 성급하고 비이성적인 투자로 내몰았습니다.
기업의 가치를 분석하고 신중하게 투자하기보다는
일단 유행하는 주식을 사고 보자는 묻지 마 투자가 횡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주식을 사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오르니까 산다”고 답했습니다.
탐욕뿐만 아니라 소외에 대한 공포 역시 수많은 사람들을
버블의 마지막 단계에 동참하게 만든 중요한 심리적 동력이었습니다.
빚으로 쌓아 올린 신기루, 마진 융자
마법의 지렛대, 레버리지의 유혹
마진 융자는 1920년대 투기 열풍을 가능하게 한 가장 핵심적인 제도였습니다.
상상해보세요. 단돈 100달러를 가지고 1,000달러짜리 주식을 살 수 있는 마법.
주가가 단 10%만 올라도 원금은 두 배가 되는 놀라운 수익률.
이것이 바로 레버리지의 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마법 같은 지렛대의 유혹에 기꺼이 몸을 던졌습니다.
적은 돈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은 모든 위험을 잊게 만들었죠.
증권사들은 경쟁적으로 대출 조건을 완화하며 고객들을 유치했습니다.
양날의 검, 파멸의 씨앗
투자자들은 빚을 내어 더 많은 주식을 사고
그 주식을 담보로 또다시 빚을 내는 위험한 게임에 빠져들었습니다.
시장 전체가 레버리지라는 약물에 중독되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마법 같은 지렛대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주가가 오를 때는 수익을 극대화해주지만 반대로 주가가 하락할 때는 손실 또한 극대화시키는 양날의 검이었죠.
만약 1,000달러짜리 주식의 가치가 10% 하락해 900달러가 되면
투자자의 원금 100달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증권사는 담보 가치가 하락하면 즉시 대출금 회수에 나서는데
이를 ‘마진 콜(Margin Call)’이라고 합니다.
투자자가 추가 증거금을 내지 못하면 증권사는 강제로 주식을 팔아버립니다.
1929년 시장이 하락세로 돌아서자 이 마진 콜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오며 투매를 불렀고
투매가 다시 주가 하락을 부추기는 악순환이 시작되었습니다.
빚으로 쌓아 올린 신기루는 결국 빚 때문에 무너져 내릴 운명이었습니다.
전문가가 굴려준다는 환상, 투자 신탁
전문가의 선택이라는 달콤한 유혹
수많은 주식들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막막했던 대중 투자자들에게
투자 신탁은 구세주처럼 보였습니다.
“복잡한 것은 우리에게 맡기고 당신은 수익만 챙기라”는 투자 신탁의 광고는
엄청난 설득력을 가졌죠.
당대 최고의 금융 전문가들이 운용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투자자들에게는 큰 신뢰를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쌈짓돈을 기꺼이 투자 신탁에 맡겼고
1920년대 후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투자 신탁이 생겨났습니다.
그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시장의 주가를 움직이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고양이에게 맡겨진 생선 가게
전문가가 대신 관리해준다는 환상은 투자자들의 경계심을 무장 해제시켰고
그들은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묻어두기만 하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투자 신탁의 운용 방식은 투자자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일부 신탁들은 자신들을 설립한 투자은행이 팔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비인기 주식이나
부실 채권을 떠넘기는 ‘쓰레기 처리장’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여러 투자 신탁이 서로의 주식을 교차로 보유하며
덩치를 키우는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A 신탁이 B 신탁의 주식을 사고 B 신탁이 다시 C 신탁의 주식을 사는 방식으로
장부상 자산을 부풀리는 것이죠.
이는 시장에 작은 충격만 와도 연쇄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극도로 위험한 구조였습니다.
투자자들의 돈은 전문가의 손에서 안전하게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고양이에게 맡겨진 생선 신세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 작전 세력의 놀이터
풀(Pool), 주가를 조작하는 비밀 결사
1920년대 월스트리트는 법과 규제가 미비한 무법지대나 다름없었습니다.
거물급 투기꾼들은 풀이라 불리는 비밀 투자 조합을 결성하여
시장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주물렀죠.
그들의 작전 방식은 치밀했습니다.
먼저 특정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기 전에 부정적인 소문을 퍼뜨려 주가를 떨어뜨립니다.
주가가 충분히 낮아지면 그들은 조용히 물량을 매집하기 시작합니다.
이후에는 자신들이 매수한 언론인이나 애널리스트를 동원해
해당 기업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고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립니다.
순진한 양들을 노리는 늑대들
이 과정에서 허위 정보와 내부자 거래는 필수적인 작전 도구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연극의 시나리오처럼 주가의 등락을 완벽하게 통제했습니다.
작전 세력의 마지막 단계는 자신들이 띄운 주식을 순진한 대중 투자자들에게 비싼 값에 떠넘기는 것이었습니다.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을 본 개미 투자자들이 흥분하여 시장에 뛰어들 때
작전 세력은 조용히 이익을 실현하고 빠져나옵니다.
폭탄 돌리기의 마지막 주자가 된 대중 투자자들은
꼭대기에서 물량을 떠안고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죠.
당시 월스트리트의 유명 인사나 기업 총수들까지도 이러한 풀에 공공연하게 참여했습니다.
시장은 공정한 경쟁의 장이 아니라 정보와 자본으로 무장한 늑대들이
순진한 양들을 사냥하는 비정한 먹이 사슬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러한 비윤리적인 행태는 시장에 대한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시키며
버블 붕괴의 또 다른 원인이 되었습니다.
언론과 경제학자, 버블의 치어리더
펜으로 부채질한 탐욕
시장의 과열을 경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촉구해야 할 언론은 정반대의 역할을 했습니다.
신문과 잡지들은 연일 주식 시장의 활황을 대서특필하며 신시대의 도래를 찬양했죠.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자극적인 기사들은 대중의 탐욕을 부채질했고 주식 투자 열풍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일부 언론인들은 작전 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특정 주식을 띄우는 기사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언론은 더 이상 객관적인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투기 광풍의 가장 열렬한 응원단이자 확성기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상아탑에서 울려 퍼진 낙관론
학계의 권위 역시 버블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던 예일대학교의 어빙 피셔 교수는
1929년 대폭락 직전 “주가는 영원히 높은 고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발언은 학문적 권위를 바탕으로 시장의 과열에 대한 대중의 마지막 의심마저 잠재워버렸죠.
피셔 교수뿐만 아니라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신시대 이론을 설파하며
주가 상승이 탄탄한 경제 펀더멘털에 기반한 합리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상아탑의 학자들마저 시대의 광기에 휩쓸려
냉철한 분석 대신 맹목적인 낙관론의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이는 투자자들에게 파국으로 향하는 길에 대한 이론적 확신을 심어주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전문가 집단의 권위에 기댄 대중의 믿음은 시장을 더욱 위험한 비이성의 영역으로 몰고 갔습니다.
투기와 신용,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
투기가 낳고 신용이 키운 버블
1920년대의 투기 열풍은 신용 팽창이라는 비옥한 토양 위에서 자라났습니다.
상상해보세요. 라디오 산업의 미래 성장 가능성에 대한 투기적 기대감이 RCA 주가를 끌어올립니다.
그러면 투자자들은 오른 RCA 주식을 담보로 은행에서 더 많은 돈(신용)을 빌릴 수 있게 되죠.
그리고 그 돈으로 다시 RCA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더욱 밀어 올립니다.
이처럼 투기가 신용 창출의 근거가 되고 그렇게 창출된 신용이 다시 투기의 연료가 되는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었습니다.
끊어지면 모두가 무너지는 사슬
주식 시장뿐만 아니라 할부 판매로 대표되는 소비 시장에서도
미래 소득(신용)을 담보로 한 투기적 소비가 경제를 이끌었습니다.
투기와 신용은 서로를 먹이 삼아 함께 몸집을 불려가는 샴쌍둥이와 같았습니다.
이러한 공생 관계는 거대한 버블을 만들어냈지만 그 구조는 극도로 취약했습니다.
모든 것이 미래는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죠.
만약 어떤 이유로든 이 기대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공생 관계는 즉시 공멸 관계로 돌변합니다.
주가 상승이 멈추면 신용 창출의 근거가 사라지고
신용 공급이 줄어들면 주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게 됩니다.
이 사슬의 어느 한 고리만 끊어져도 시스템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1929년의 붕괴는 바로 이 투기와 신용의 위험한 사슬이
한계에 부딪히며 한꺼번에 끊어져 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르다’ 집단적 착각의 심리학
과거를 잊은 자들의 위험한 자신감
인간은 역사를 통해 배운다고 하지만 금융 시장의 역사에서 이 격언은 종종 무색해집니다.
1920년대 투자자들 역시 과거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이나
영국의 남해회사 버블 같은 투기 역사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시대는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과거에는 자동차도 라디오도 연방준비제도도 없었다.
지금은 과학적 경영과 기술 혁신이 무한한 성장을 보장하는 신시대다.”
이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비관론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
이번에는 다르다는 말은 투기 역사상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네 단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대를 막론하고 버블의 정점에서 항상 등장하는 위험한 주문입니다.
이 주문은 투자자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과거의 교훈을 잊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버블이 한창일 때 시장의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비관론자 혹은
모두의 축제를 망치려는 방해꾼으로 매도당하기 일쑤죠.
1929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 소수의 분석가들이 시장의 과열을 경고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대중의 열광과 전문가들의 낙관론에 묻혀버렸습니다.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의심하게 만드는 불편한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집단적 현실 외면은 일종의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하여
합리적인 의심을 제기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갈 때 홀로 멈춰 서거나
반대 방향으로 가기란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법입니다.
파티의 끝을 알리는 첫 번째 경고음
실물 경제에서 감지된 균열의 징후
영원할 것 같던 파티에도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29년 여름 주식 시장의 화려한 불꽃놀이 뒤편에서는
실물 경제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산업 생산을 이끌던 철강 생산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고
전국적으로 활발했던 주택 및 상업용 건물 건설 경기도 급격히 냉각되었습니다.
이는 기업들의 미래 수익에 대한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명백한 위험 신호였죠.
하지만 대부분의 주식 투자자들은 이러한 거시 경제 지표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매일같이 치솟는 주식 시세판의 숫자만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해외에서 불어온 역풍
금융 시장이 실물 경제라는 뿌리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자신만의 논리로 폭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불안한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세계 경제의 중심이었던 영국이 금리를 인상하면서
더 높은 수익률을 좇아 미국 시장에 들어와 있던 유럽의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주식 시장을 떠받치던 막대한 유동성의 한 축이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했죠.
또한 미국 정부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은 다른 국가들과의 무역 마찰을 불러일으켜
수출 전망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국내의 투기 열기에 취해 있던 투자자들은
이러한 글로벌 경제의 상호 연관성을 간과했습니다.
그들은 미국 경제가 외부의 영향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영원히 번영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밥슨 브레이크 예언가의 저주
시장을 얼어붙게 한 한마디
1929년 9월 5일 금융 분석가 로저 밥슨(Roger Babson)은 한 연설회에서
시장에 찬물을 끼얹는 예언을 합니다.
“조만간 끔찍한 붕괴가 닥칠 것이며 그 하락폭은 60에서 80포인트에 달할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대폭락을 예고한 것이죠.
그의 발언이 전해지자 시장은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투자 심리가 급격히 위축되며 주가는 2~3%가량 하락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밥슨 브레이크(Babson Break)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시장이 얼마나 불안한 심리 위에 서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예언에 대한 조롱과 일시적 반등
단 한 사람의 비관적인 전망이 시장 전체를 흔들 수 있을 만큼
투자자들의 믿음은 이미 위태로운 상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장은 곧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월스트리트의 주류 전문가들과 언론은 밥슨을
“근거 없는 공포를 조장하는 늙은 비관론자”라며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저명한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주가는 전혀 비싸지 않다”며
밥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죠.
이러한 전문가들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투자자들은 다시 안도했고
주가는 며칠 만에 하락분을 모두 회복하고 다시 상승세를 타는 듯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밥슨의 경고를 한여름 밤의 악몽 정도로 치부하며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시장의 정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마지막 경고였습니다.
예언가의 저주는 잊히는 듯했지만 한 달여 뒤 훨씬 더 끔찍한 현실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폭풍전야, 불안한 줄다리기
힘을 잃어가는 상승 동력
밥슨 브레이크 이후 시장은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이전과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주가는 더 이상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리지 못하고
등락을 반복하며 불안한 횡보를 거듭했죠.
상승 동력은 눈에 띄게 약해진 반면 매도 압력은 점점 거세졌습니다.
이는 시장의 에너지가 소진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신호였습니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정점에 도달한 뒤 힘을 잃고 부서지기 직전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탐욕과 공포의 아슬아슬한 균형
가장 똑똑하고 민감한 투자자들은 이미 파티가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출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투자자들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마지막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투자자들의 마음속에서는 ‘더 오를 것’이라는 탐욕과 ‘이제는 떨어질 것’이라는 공포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가가 조금만 올라도 역시 신시대는 끝나지 않았다며 안도했지만
작은 하락에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불안에 떨었죠.
시장은 극도로 예민해져 작은 소문 하나에도 크게 출렁였습니다.
이러한 심리적 불안정성은 시장의 변동성을 극대화시켰습니다.
모든 것이 위태로운 균형 위에 놓여 있었고 이 균형을 무너뜨릴 아주 작은 충격만으로도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쏠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모두가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우산을 펴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운명의 그날,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무너진 신뢰, 투매의 시작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뉴욕 증권거래소의 개장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마자
둑이 터진 듯한 매도 물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전 며칠간의 불안한 장세가 투자자들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결과였죠.
“더 늦기 전에 팔아야 한다”는 공포 심리가 순식간에 시장 전체로 번져나갔습니다.
너도나도 주식을 팔려고 했지만 사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가는 그야말로 수직으로 낙하했습니다.
제너럴일렉트릭 US스틸과 같은 우량주들조차
개장 몇 시간 만에 엄청난 폭으로 하락했습니다.
아비규환의 객장, 멈춰버린 시간
지난 몇 년간 시장을 지배했던 사면 오른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팔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공포로 바뀌는 데는 단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날 증권거래소 객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평소의 활기는 온데간데없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브로커들이 절규하듯 호가를 외쳤습니다.
쏟아지는 매도 주문에 주가 시세 표시기인 티커는 거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한참 뒤처졌습니다.
투자자들은 자신의 주식이 얼마에 팔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불확실성 속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죠.
이날 하루 동안 거래된 주식은 1,290만 주에 달했으며 이는 이전의 기록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치였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신시대의 심장이 멎어버린 순간
미국 역사상 가장 길고 어두운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습니다.
거물들의 실패한 구출 작전
월스트리트의 구원투수 등판
검은 목요일 오후 시장이 공황 상태에 빠지자
월스트리트의 심장부인 JP모건 빌딩으로 당대 최고의 은행가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내셔널 시티 은행 체이스 내셔널 은행 등 굴지의 은행 총재들은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해 긴급 대책 회의를 열었죠.
회의 결과 그들은 막대한 자금을 공동으로 투입하여
시장의 핵심 우량주들을 매입함으로써 투자 심리를 안정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마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과 같은
민간 부문에서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구제 금융 조치였습니다.
역부족이었던 인위적 부양책
JP모건의 부회장 토머스 러몬트가 “시장에 질서 있는 거래를 보장하겠다”고 발표하자
패닉에 빠졌던 시장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습니다.
은행가들의 구출 작전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들이 US스틸과 같은 주요 주식을 공개적으로 매수하자
폭락하던 주가는 하락세를 멈추고 일부 반등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미 시장 참여자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공포는
몇몇 은행가들의 자금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죠.
한번 무너진 신뢰는 돈만으로는 살 수 없었습니다.
많은 투자자들은 은행가들의 개입을 시장을 탈출할 마지막 기회로 여겼고
주말이 지나고 다음 주가 되자 매도 물량은 이전보다 더욱 거세게 시장을 덮쳤습니다.
결국 거물들의 야심 찬 구출 작전은 시장 붕괴의 속도를 잠시 늦췄을 뿐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파국, 10월 29일 ‘검은 화요일’
모든 것이 무너진 날
1929년 10월 29일 화요일 미국 금융 역사상 최악의 날로 기록될
검은 화요일의 막이 올랐습니다.
지난주 은행가들의 개입으로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던 시장은
주말 동안 더욱 증폭된 공포와 함께 다시 문을 열었죠.
개장과 동시에 검은 목요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묻지 마 투매가 시장을 휩쓸었습니다.
이날 하루에만 1,640만 주라는 천문학적인 물량이 거래되었고
다우존스 지수는 무려 12%나 추가로 폭락했습니다.
수많은 우량주들의 가치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마진 콜, 파멸의 연쇄 반응
이날의 붕괴는 단순한 조정을 넘어 지난 10년간 미국 경제를 지탱해왔던
신시대라는 신화가 완전히 파산했음을 선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검은 화요일의 비극을 더욱 가속한 것은 바로 마진 콜의 연쇄 반응이었습니다.
주가가 폭락하자 빚을 내 주식을 샀던 투자자들에게
증권사로부터 추가 증거금을 요구하는 마진 콜이 빗발쳤습니다.
하지만 이미 큰 손실을 본 투자자들에게 추가로 돈을 낼 여력은 없었죠.
결국 증권사들은 담보로 잡고 있던 주식을 시장 가격에 강제로 처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강제 매도 물량은 시장에 쏟아져 나와 주가 하락을 더욱 부채질했고
이는 또 다른 마진 콜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만들어냈습니다.
빚으로 쌓아 올렸던 레버리지의 탑이 이제는 빚 때문에 서로를 무너뜨리는 도미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멈춰버린 티커, 마비된 시스템
기술의 한계가 드러낸 혼돈
검은 화요일의 대혼란 속에서 시장의 신경망 역할을 하던 기술 시스템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분당 수백 건의 거래 정보를 종이테이프에 찍어내던 주가 시세 표시기 티커(ticker)는
천문학적인 거래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몇 시간씩이나 뒤처졌습니다.
투자자들은 자신이 내놓은 주식이 팔렸는지 얼마에 팔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애를 태워야 했죠.
전화와 전신 시스템 역시 불통이 되어 월스트리트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거대한 혼돈의 섬이 되어버렸습니다.
신뢰의 붕괴, 시장 기능의 정지
‘신시대’의 번영을 이끌었던 기술의 발전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술의 한계로 인해
위기를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시스템의 마비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 시장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매수와 매도라는 시장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가격 발견은 불가능했습니다.
시장은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의 공간이 아니라
오직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공포만이 지배하는 원시적인 전쟁터가 되어버렸죠.
어떤 주식은 매수 호가가 아예 사라져 거래 자체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고 믿었던 시장 시스템이
극단적인 공포 앞에서는 얼마나 허무하게 멈춰 설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비극, 절망의 그림자
숫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
주가 대폭락은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차가운 숫자의 나열이 아니었습니다.
그 숫자 하나하나에는 평생 모은 돈을 잃은 가장의 절망
자녀의 학자금을 날린 어머니의 눈물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을 송두리째 빼앗긴
젊은이들의 좌절이 담겨 있었습니다.
광란의 20년대 동안 부풀었던 희망이 클수록
그 희망이 터져버렸을 때의 절망감은 더욱 깊었습니다.
뉴욕의 고급 호텔에서는 투신자살을 하는 투자자들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했고 사회 전체가 깊은 트라우마에 빠져들었습니다.
부서진 아메리칸드림
경제적 붕괴는 곧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는 인간적인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1920년대 미국인들에게 주식 시장은 아메리칸드림을 실현시켜 줄 가장 확실한 통로였습니다.
가난한 구두닦이도 시골의 농부도 주식만 잘 사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사회를 지탱했죠.
하지만 대폭락은 이 모든 환상을 무참히 깨뜨려 버렸습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었고
사회 시스템 자체에 대한 깊은 불신과 냉소에 빠져들었습니다.
주가 폭락은 단순히 돈을 앗아간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정신을 지탱하던 가장 중요한 가치인 희망을 앗아갔습니다.
바보들의 반등 꺼져가는 불씨
하이에나와 순진한 투자자들의 합창
대폭락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시장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일부에서는 “위기는 곧 기회”라며 폭락한 주식을 헐값에 주워 담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죠.
록펠러와 같은 거부들이 “미국의 미래를 믿는다”며 주식 매수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에 용기를 얻은 일부 순진한 투자자들도 바닥이라 믿고 시장에 다시 뛰어들었습니다.
이들의 매수세에 힘입어 주가는 1929년 말부터 1930년 초까지 잠시 반등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더 깊은 절망으로 가는 덫
하지만 이는 실물 경제의 회복에 기반한 건강한 상승이 아니었습니다.
대폭락의 잿더미 속에서 단기 차익을 노리는 하이에나들과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순진한 투자자들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신기루에 불과했습니다.
이 짧은 반등은 결국 더 큰 비극을 낳는 덫이 되었습니다.
이제 위기가 끝났다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시장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은
이후 몇 년간 이어진 기나긴 하락의 늪에서 남은 재산마저 모두 잃어야 했습니다.
훗날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죽은 고양이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한 번은 튀어 오른다”는 냉소적인 말에 빗대어
‘죽은 고양이의 반등(Dead Cat Bounce)’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는 시장의 본질적인 펀더멘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기술적 반등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1930년의 짧은 봄은 곧이어 닥쳐올 혹독한 겨울의 시작을 잠시 잊게 해준 기만적인 햇살이었습니다.
끝없는 추락, 대공황의 서곡
금융 위기에서 실물 경제 위기로의 전이
1929년의 주가 대폭락은 그 자체로도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더 큰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주식 시장에서 증발해버린 천문학적인 돈은 금융 시스템의 동맥경화를 일으켰고
그 충격은 곧 실물 경제의 온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자산 가치가 폭락하자 사람들은 지갑을 닫았고 소비가 급감하자 기업들은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팔리지 않는 물건 앞에서 기업들은 공장 가동을 멈추고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밖에 없었죠.
은행 시스템의 연쇄 붕괴
주식 시장의 붕괴가 소비 위축, 생산 감소, 대량 실업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공황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실물 경제의 위축은 금융 시스템에 다시 한번 치명타를 안겼습니다.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하고 실업자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은행들은 막대한 부실 채권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은행의 건전성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사람들은 자신의 예금을 지키기 위해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인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뱅크런(Bank Run) 사태가 전국적으로 발생했고
지급 준비금이 부족했던 수많은 은행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은행 시스템의 붕괴는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을 완전히 차단해버렸고
미국 경제는 회복 불가능한 깊은 침체의 늪 즉 대공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거인들의 몰락
‘신시대’의 아이콘, 그들의 초라한 퇴장
광란의 20년대 동안 대중의 선망과 질투를 한 몸에 받았던 월스트리트의 거인들은
시장 붕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했습니다.
공격적인 영업으로 투자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내셔널 시티 은행의 총재 찰스 미첼은
청문회에 불려 나가 불법적인 관행을 추궁당한 끝에 불명예 퇴진해야 했습니다.
제너럴 모터스(GM)의 창업자이자 당대 최고의 투기꾼으로 불렸던 윌리엄 듀랜트는
파산하여 한때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탐욕의 대가, 사회적 분노의 표적이 되다
그들의 극적인 몰락은 신시대가 결국 허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시장이 붕괴하자 어제까지 영웅으로 칭송받던 금융가들은
하루아침에 대중의 분노를 유발하는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행이 그들의 무책임한 탐욕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이후 진행된 의회 청문회에서는 투자 신탁의 비윤리적인 운용
작전 세력의 시세 조작 내부자 거래 등
월스트리트의 추악한 이면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금융 산업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극도로 심화시켰고
이후 강력한 금융 규제 법안이 만들어지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화려했던 파티의 주역들은 이제 그 파티의 모든 비용을 청구받는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정부의 미숙한 대응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맹신
미증유의 경제 위기 앞에서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이끌던 미국 정부는
당혹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후버 행정부는 “시장의 문제는 시장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의 원칙을 굳게 믿고 있었죠.
그들은 정부가 인위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오히려 경제의 자연스러운 회복 과정을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위기 초기 정부는 시장을 구제하기 위한 적극적인 재정 정책이나 유동성 공급에 나서기보다는
기업가들에게 임금 삭감을 자제하고 투자를 계속해달라고 독려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위기를 심화시킨 정책 실패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맹신이 정부의 눈과 귀를 멀게 한 것입니다.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은 결국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고 실물 경제가 급격히 위축되는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 부재는 시장의 불확실성과 공포를 극대화시켰습니다.
특히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최악의 정책 실패로 꼽힙니다.
이 법안은 다른 국가들의 보복 관세를 불러일으켜 전 세계적인 무역 전쟁을 촉발했고
이는 세계 교역량을 급감시켜 대공황을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신뢰
무너진 금융 시스템의 기둥
1929년 대폭락 이후 미국 사회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뢰였습니다.
특히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은행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은행이 자신의 돈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매트리스 밑이나 장롱 속에 현금을 숨기는 것을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죠.
이러한 신뢰의 붕괴는 ‘뱅크런’ 사태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고 수천 개의 은행이 문을 닫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실
은행이 무너지자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이 끊겼고
경제는 더욱 깊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자산이 무너졌을 때 금융 시스템 전체가
어떻게 마비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은행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믿음도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은 허황된 신기루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고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현재를 버텨내는 것에 급급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비관론과 무력감은 소비와 투자를 극도로 위축시켜
대공황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1929년의 붕괴는 단순히 경제적 파산을 넘어
한 세대의 미국인들에게서 미래를 훔쳐 간 사건이었습니다.

뉴딜 정책, 새로운 시대의 약속
‘보이는 손’의 등장
대공황이라는 깊은 절망 속에서 미국인들은 변화를 갈망했습니다.
1932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고 외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그는 뉴딜(New Deal)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경제 위기 극복의 전면에 나서는
일련의 과감한 정책들을 추진했습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와 같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은행의 예금을 정부가 보증하는 예금보험제도를 도입했으며
최저임금제와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이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만 의존하던 시대가 끝나고 정부라는 ‘보이는 손’이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뉴딜 정책은 단순히 경기를 부양하는 것을 넘어
미국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틀을 바꾸는 개혁이었습니다.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설립하여 주식 시장의 불공정 거래를 감시하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분리하는 글래스-스티걸법을 제정하여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은 탐욕스러운 자본의 폭주에 규제라는 고삐를 채우려는 시도였습니다.
비록 뉴딜 정책이 대공황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막고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미국 경제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끝나지 않은 투기의 역사
형태를 바꾸어 반복되는 버블
1929년의 대참사 이후 미국 정부는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수많은 금융 규제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인간의 탐욕이 규제의 벽보다 항상 한 수 위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새로운 기술과 금융 기법이 등장할 때마다
투기의 광풍은 어김없이 다시 불어왔습니다.
1987년의 검은 월요일 2000년의 닷컴 버블 붕괴
그리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 위기까지
투기 버블의 생성과 붕괴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패턴이 되었습니다.
기억과 망각의 순환
주체와 대상 그리고 명분은 매번 바뀌었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는
인간의 비이성적 탐욕과 군중심리는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습니다.
금융 시장의 역사는 ‘기억’과 ‘망각’의 끊임없는 순환 과정이기도 합니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고
위험을 관리하고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고 새로운 세대가 시장의 주역으로 등장하면
과거의 교훈은 점차 잊히고 이번에는 다르다는 오만한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과거의 실수를 잊어버리도록 설계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적으로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현재를 비추어볼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1929년이 오늘에게 던지는 질문
우리는 ‘신시대’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 블록체인 바이오 기술 등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술 혁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러한 기술들이 인류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고
우리를 새로운 번영의 시대로 이끌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1920년대의 자동차와 라디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1929년의 역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이 ‘신시대’는 과연 실체인가, 아니면 또 다른 거대한 환상에 불과한가?”
기술 발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자산 시장의 비이성적인 과열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냉철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탐욕과 공포 사이, 우리의 선택은
1929년의 투자자들과 오늘날의 우리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들보다 더 똑똑하고 더 이성적이며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스마트폰 터치 한 번으로 전 세계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시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과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요?
1929년의 이야기는 결국 기술이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탐욕과 공포라는 인간의 변치 않는 본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서 우리는 탐욕과 공포 사이의 외줄 위를 걷고 있습니다.
1929년이 남긴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신중한 걸음을 내디딜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지 그 선택은 오롯이 우리의 몫입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절반만 맞을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결코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지 않습니다.
1929년과 오늘날의 금융 환경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릅니다.
당시에는 없었던 수많은 규제와 안전장치가 마련되었고
위기에 대응하는 중앙은행의 역할과 능력 또한 크게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1929년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분명 많은 것을 배웠고
그 교훈을 바탕으로 더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왔습니다.
따라서 1929년과 똑같은 형태의 붕괴가 오늘날 재현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더 중요한 교훈은 환경과 시스템이 아무리 변해도
시장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인 인간의 심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탐욕은 더 큰 탐욕을 부르고 공포는 더 큰 공포를 낳는
심리적 전염 현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납니다.
새로운 기술과 금융 상품은 오히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더욱 교묘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자극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1929년의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된
비이성적 욕망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지 몰라도 역사의 교훈은 영원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