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꽃 한 송이가 집 한 채 값이라고?
말도 안 돼” 아마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하지만 믿기 어렵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네덜란드에서는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랍니다.
바로 역사상 가장 기이하고도 유명한 투기 광풍
튤립 버블 이야기죠.
단순한 꽃 몇 송이가 전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국가 경제를 뒤흔들 뻔했던 이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어요.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면서도
그 끝은 씁쓸한 교훈을 남기는 튤립 버블의 세계로
저와 함께 깊숙이 빠져 들어가 보실래요?
어쩌면 이 이야기가 변화무쌍한 현대 경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값진 통찰을 선물할지도 모르니까요.
황금시대의 빛과 그림자 튤립 네덜란드를 홀리다
때는 17세기 초중반 네덜란드는 그야말로
역사상 유례없는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어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중계 무역과 강력한 해상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죠.
특히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아시아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며
네덜란드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어요.
암스테르담은 런던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금융의 허브로 급부상했고
세계 최초의 주식 거래소도 이곳에서 문을 열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답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자 네덜란드 시민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어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부를 손에 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사치품이나 아름다운 예술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죠.
시민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고 싶어 했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독특하고 희귀한 것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때 운명처럼 네덜란드 땅에 발을 들인 것이
바로 튤립이었어요.
튤립의 등장과 초기 인기
튤립은 원래 중앙아시아와 터키 지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어요.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 주재 합스부르크 대사였던
오지에르 기슬랭 드 부스베크가 튤립 구근을
유럽으로 처음 들여왔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터키인들이 ‘튤리판(tülbend)’
즉 터번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페르시아어로 튤립을 의미하는 ‘듈반드(dulband)’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죠.
어쨌든 이 이국적인 꽃은 처음에는 유럽의 왕족이나
부유한 귀족 그리고 전문 식물학자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재배되며 그 아름다움을 뽐냈어요.
특히 유명한 식물학자였던 카롤루스 클루시우스는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 식물원에서 다양한 튤립 품종을
연구하고 재배하며 튤립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죠.
그는 자신이 재배한 희귀 튤립 구근을
엄청난 가격에 팔기도 했는데 밤중에 도둑들이
그의 정원에 침입해 귀한 구근을 훔쳐 가는
사건까지 발생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튤립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네덜란드는 낮은 지대와 비옥한 토양 덕분에
구근 식물 재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어요.
또한 국토가 좁아 넓은 정원을 갖기 어려웠던
네덜란드인들은 작지만 아름답게 꾸민 정원을
선호했는데 이국적이고 화려한 튤립은
이런 정원을 장식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이템이었죠.
점차 튤립은 단순한 원예 식물을 넘어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사치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명품 가방이나 고급 시계로
자신을 드러내듯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희귀하고 아름다운 튤립을 소유하는 것이
곧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셈이에요.
튤립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 비밀 색 깨짐 현상
그런데 이 튤립에는 사람들을 더욱더 열광하게 만드는
특별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어요.
바로 ‘색 깨짐(color breaking)’ 현상이었죠.
당시 사람들은 그 원리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특정 바이러스(튤립 모자이크 바이러스)에 감염된
튤립 구근은 꽃잎에 예측 불가능하고 다채로우며
매우 아름다운 줄무늬나 불꽃무늬를 나타냈어요.
평범한 단색 튤립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듯한 현란한 무늬를 가진
‘브로큰 튤립(broken tulip)’으로 변신하는 이 현상은
튤립에 엄청난 희소성과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마치 평범한 돌멩이가 하루아침에 다이아몬드로
변하는 것과 같은 신비로움과 기대감을 안겨주었죠.
어떤 품종은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져 있었고 또 어떤 품종은
벨벳처럼 부드러운 보라색 바탕에
섬세한 깃털 무늬를 자랑했어요.
이처럼 독특하고 아름다운 ‘브로큰 튤립’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기 시작했고
“나도 혹시 저런 희귀한 튤립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이 사람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광란의 튤립 투기 그 서막이었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사자” 광란의 튤립 시장
16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사회는
그야말로 튤립 열기로 뒤덮이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파리 등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튤립 구근 가격이 심상치 않게 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네덜란드에서는 그야말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튤립 시장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급증했어요.
이전까지만 해도 튤립은 일부 부유층이나
전문 원예가들의 고상한 취미 정도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평범한 직조공 방적공 구두 수선공
빵집 주인 식료품 가게 주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선원이나
농사를 짓던 농부들까지 “튤립으로 인생 역전”을
외치며 투기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이 주식 사면 대박 난다더라”하는
소문에 너도나도 주식 계좌를 트는 것처럼
당시 네덜란드 사회 전체가 튤립이라는
거대한 투기판으로 변해갔던 것이죠.
튤립 거래 방식의 변화 콜리지와 빈트한델
튤립 거래 방식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어요.
초기에는 주로 개인 간의 은밀한 협상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졌지만 투기 열풍이 거세지면서
점차 공개적이고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사람들은 특정 여관이나 선술집의 방을 빌려
그곳에서 튤립 구근을 거래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비공식적인 거래 장소를
콜리지(Colleges)라고 불렀어요.
마치 오늘날의 증권사 객장이나 코인 거래소처럼
이 콜리지 안은 튤립을 사고팔려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흥정과 담배 연기 술 냄새가 뒤섞여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고 해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서로 경쟁하듯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튤립을 홍보했고
때로는 격렬한 몸싸움까지 벌어지기도 했다니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콜리지에서는
거래 수수료 명목으로 ‘와인 머니(wine money)’를 걷어
참가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며
밤늦도록 투기판을 벌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광란의 축제 분위기였던 셈이죠.
더욱 놀라운 것은 튤립 투기가 절정으로 치닫던
1636년 말부터 1637년 초에는 아직 땅속에
심어져 있지도 않은 즉 존재하지도 않는
튤립 구근에 대한 선물 거래까지 등장했다는 사실이에요.
이를 당시 사람들은 ‘빈트한델(windhandel)’
즉 ‘바람을 파는 거래‘라고 불렀습니다.
판매자는 다음 해 봄에 특정 품종과 무게의
튤립 구근을 인도하겠다고 약속하고
구매자는 그 권리를 사는 것이었죠.
물론 대부분의 거래는 실제 구근 인도보다는
중간에 가격 변동에 따른 차액을
현금으로 정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어요.
심지어 현금 대신 개인 신용장이나 어음을 발행하여
거래 대금을 지불하고 실제 구근이 땅에서 나올 봄에
가서야 정산하는 방식도 흔했습니다.
한 투기꾼은 튤립 거래로 무려 6만 길더라는
거금을 벌었다고 자랑했지만 정작 그가 손에 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신용장뿐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야말로 실체가 없는 돈이 허공에서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아슬아슬한 투기판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상상을 초월하는 튤립 가격
이러한 광적인 투기 열풍 속에서 튤립 가격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까지 치솟았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노동자의 연평균 임금이
200~400길더였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어지간한 집 한 채 가격이 300길더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가격이 얼마나 비정상적이었는지 알 수 있어요.
기록에 따르면 ‘구다(Gouda)’라는 품종의 튤립 구근은
불과 몇 주 만에 20길더에서 225길더로
10배 이상 폭등했고 ‘제네랄리시모(Generalissimo)’ 품종은
95길더에서 900길더까지 가격이 치솟았다고 합니다.
한때는 잡초 취급을 받으며 바구니째 거름더미에
버려지던 평범한 노란색 ‘크로넨(Croenen)’ 품종조차
몇 주 사이에 20길더에서 1200길더 이상으로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면 튤립 값이 올라 있더라”는 말이
나올 법했죠.
가장 유명세를 떨쳤던 희귀 품종인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어요.
이 품종은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불꽃무늬가 특징이었는데 한때 구근 하나가
무려 6000길더 이상에 거래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 암스테르담의 최고급 저택 여러 채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죠.
‘바이스로이(Viceroy)’라는 또 다른 고급 품종은
한때 3000길더에 팔리던 것이 두 배로 뛰기도 했다고 해요.
한 기록에 따르면 튤립 구근 단 하나를 팔아 받은 돈으로
밀 27톤 호밀 50톤 살찐 황소 네 마리
살찐 돼지 여덟 마리 살찐 양 열두 마리
고급 포도주 두 통 맥주 네 통 버터 두 통
치즈 세 통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침대와 옷가지 한 벌 그리고
은으로 만든 술잔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튤립 하나가 한 가문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터무니없는 가격이
언젠가는 꺼질 거품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팔기 전까지만 오르면 돼”라는
위험한 생각으로 너도나도 이 광란의 투기판에
몸을 던졌습니다.
한 투기꾼이 친구에게 “이 미친 짓이 2~3년만
계속되어도 나는 충분하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당시 사람들의 불안하면서도 탐욕스러운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죠.
거품은 꺼지기 마련 한순간에 몰락한 튤립 시장
모든 거품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죠.
영원할 것만 같았던 튤립 투기의 열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637년 2월 3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튤립 시장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악재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다만 봄이 가까워지면서 선물 계약으로 거래된
튤립 구근을 실제로 인도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더 이상 이 터무니없는 가격에 튤립을 사려는
“더 큰 바보”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죠.
특히 네덜란드 서부의 주요 꽃 거래 중심지였던
하를럼(Haarlem)에서는 “더 이상 구매자가 없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바로 다음 날에는 어떤 가격을 제시해도
튤립 구근을 팔 수 없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여겨졌던
튤립 구근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선물 계약은 이행될 수 없었고 신용장은
부도 처리되었으며 연쇄적인 채무 불이행이
네덜란드 사회를 강타했습니다.
전문 화훼상들은 투기꾼들로부터 밀린 대금을
받아내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이미 빈털터리가 된 그들에게서 돈을 회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죠.
밤새도록 여관방에서 튤립을 외치던 사람들의
환호성은 절규와 한숨으로 바뀌었습니다.
다행히도 튤립 버블의 붕괴가 네덜란드 경제 전체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국가적인 대재앙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중론입니다.
당시 네덜란드 경제의 실질적인 기둥 역할을 했던
동인도 회사의 거상들이나 주요 은행가들은
이 투기 광풍에 깊숙이 발을 담그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들은 튤립을 부의 표현 수단으로 여겼을 뿐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보지는 않았던
현명함을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무사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특히 평범한 서민들 중에는 전 재산을 털어
튤립에 투자했다가 한순간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집을 저당 잡히고 가재도구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튤립을 샀던 사람들은 절망의 늪에 빠졌죠.
심지어 당시 네덜란드의 유명한 풍경화가였던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마저도 튤립 투기로
큰 손실을 입고 결국 파산하여
궁핍한 말년을 보냈다고 하니 그 피해의 규모와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풍경화 속에 담긴 평화로운
네덜란드의 모습과는 달리 그의 현실은
튤립 버블의 쓴맛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던 것이죠.
튤립 시장을 둘러싼 법적 분쟁은 한동안
네덜란드 사회를 시끄럽게 했습니다.
결국 1638년 5월 정부 차원에서 구성된
특별 위원회는 튤립 계약 가격의 단 3.5%만을
지불하면 기존의 튤립 매매 계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중재안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투기꾼들의 채무를 대폭 탕감해 주는
조치였지만 이미 시장이 붕괴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무렵에는 시장이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다시금 아마추어 구근 수집가들이 시장에 나타나
헐값에 희귀한 품종의 구근들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몇몇 귀한 품종의 튤립 가격은 몇 년 안에
광풍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기도 했다고 해요.
하지만 대다수의 일반 투기꾼들이 몰렸던
평범한 품종의 튤립 소위 ‘보통 물건(gemeene goed)’이나
‘넝마(rodderij)’라고 불리던 것들의 가격은
결코 이전 수준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만을 남겼습니다.
튤립 공포증과 예술 문화에 미친 영향
튤립 버블이 꺼진 후 네덜란드 사회에는
튤립 공포증(tulipophobia)이라고 불릴 만큼
튤립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불신이 만연했습니다.
레이던 대학의 식물학 교수였던
에브라르 포르스티우스는 길을 가다가 튤립만 보면
격분하여 자신의 지팡이로 마구 때려 부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니 당시 사람들이 튤립에 대해
느꼈던 배신감과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때 부와 아름다움 행운의 상징이었던 튤립은
순식간에 허영 어리석음 사치 그리고
덧없는 욕망의 대명사로 전락하고 말았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당시 네덜란드의
예술과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주제로 하는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에서는 해골 모래시계
꺼진 촛불과 함께 시든 튤립이 단골 소재로 등장하여
인간 욕망의 허무함을 경고하는 상징물로
활용되었습니다.
마치 로마의 도덕주의자 바로(Varro)가
“인간은 거품과 같다(Homo bulla est)”고 말했듯
한순간 화려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투기의 속성을
튤립이 고스란히 대변하게 된 것이죠.
반짝이는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유혹했지만
결국 덧없이 시들어버리는 튤립의 모습은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투기꾼들의
허황된 욕망과 그 비참한 결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400년 전 광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에이 그건 그냥 아주 먼 옛날 특별한 시대에
일어났던 해프닝 아닌가요?
지금 우리랑은 상관없는 이야기 같은데요.”
혹시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하지만 놀랍게도 튤립 버블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을 넘어섭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성과 투기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이었던
찰스 맥케이는 그의 유명한 저서
“대중의 미망과 광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리 지어 생각하고 무리 지어 미쳐가지만
정신을 차리는 것은 천천히 그리고 한 사람씩이다.”
400년 전 네덜란드를 휩쓸었던 튤립 버블 역시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맹목적인 군중심리가 빚어낸
거대한 ‘집단적 광기’의 생생한 증거라고 할 수 있겠죠.
반복되는 투기 사이클과 인간 심리
튤립 버블이 형성되고 붕괴하는 과정은
이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투기 사이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투자 대상의 등장(튤립)
초기 투자자들의 엄청난 성공 신화 전파
이에 자극받은 대중의 비이성적인 시장 참여
실질적인 가치와 무관한 가격 폭등
실체 없는 신용의 팽창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갑작스러운
거품 붕괴와 그로 인한 수많은 개인들의 파산.
이 시나리오는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시대와 장소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재현되어 왔습니다.
18세기 영국의 남해회사 거품(South Sea Bubble)
1920년대 미국의 대공황 직전 주식시장 과열
2000년대 초반의 닷컴 버블 그리고 최근의
암호화폐 열풍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과
규모는 다를지언정 그 밑바탕에 깔린
인간의 심리와 시장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패턴을 보입니다.
튤립 버블에 대한 다른 시각과 더 큰 바보 이론
물론 일부 경제학자들은 튤립 버블이 알려진 것만큼
그렇게 심각한 ‘광기’는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경제 상황과 희귀 품종에 대한
수요를 고려할 때 어느 정도 합리적인 가격 형성
과정의 일부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피터 가버와 같은 학자는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같은
특정 고급 품종의 경우 그 아름다움과 희소성 때문에
높은 가격이 매겨질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일반 품종의 가격 폭등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국한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하죠.
하지만 당시의 수많은 기록들은 일반인들이
주로 거래했던 평범한 품종의 튤립 가격조차도
정상적인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수준까지 치솟았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투기꾼들은 튤립의 내재적 가치나
미래의 현금 흐름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내가 산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이 튤립을
사줄 다음 사람이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죠.
이것이 바로 더 큰 바보 이론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이러한 시장 상황은 결코 합리적인 투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성과 감정의 균형 그리고 공짜 점심은 없다
그렇다면 이 400년 전 네덜란드의 튤립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투자의 세계에서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시장이 과열되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지금이 기회다”라고 외칠 때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자신의 투자 원칙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만 소외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FOMO)
“이번에는 다를 거야”라는 막연한 낙관론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돈을 벌고 싶다”는
인간의 본능적인 탐욕은 종종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만들죠.
튤립 버블은 우리에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냉엄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 이콘아크 (EconArk) All rights reserved
이콘아크의 모든 정보는 현명한 판단을 돕기 위한 참고 자료입니다.
저희 글을 참고하여 내린 투자 결정과 그 결과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귀속됩니다.
All information on EconArk is a reference to aid your informed judgment.
The final responsibility for any investment decisions made by referencing our content, and for their outcomes, rests solely with the inves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