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6편에서는, 베네수엘라가 어떻게 무법의 땅에서 세계적인 석유 대국으로 발돋움했는지
그 눈부신 성공의 시기, 즉 ‘황금시대’를 해부하고
그 성공이 어떻게 단 한 번의 치명적인 방향 전환으로 인해
기나긴 쇠락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는지 그 운명적 전환점까지를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엮어보려 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산업사가 아니라,
한 국가가 자신의 가장 큰 축복을 어떻게 가장 큰 저주로 바꾸었는지,
그 비극의 연대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서막입니다.
1부: 대혼돈의 시대 – 석유 발견 초기의 무법지대 (1900년대 초 ~ 1920년대)
베네수엘라에서 석유가 상업적으로 발견된 20세기 초,
그곳은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서부 개척시대와도 같았습니다.
로열 더치 셸(Royal Dutch Shell),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과 같은
외국의 거대 석유 회사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지만,
그들을 규율할 통일된 법이나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권 사냥꾼’들의 각축장
당시 베네수엘라를 통치하던 독재자 시프리아노 카스트로는
석유 개발권을 마치 자신의 개인 재산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는 측근들과 이권 사냥꾼들에게 헐값에 광대한 지역의 탐사권을 넘겼고,
이들은 다시 그 권리를 외국 석유 회사들에게 몇 배의 가격으로 되팔아
막대한 차익을 챙겼습니다.
모든 것이 비밀스러운 거래와 인맥, 그리고 뇌물로 이루어졌습니다.
국가의 부는 투명한 시스템을 통해 국고로 환수되는 대신,
소수의 부패한 엘리트들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외국 석유 회사들의 입장에서도 이곳은 기회의 땅인 동시에
거대한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었습니다.
계약 조건은 탐사권마다 제각각이었고,
정부가 언제 변덕을 부려 계약을 파기하고 세금을 올릴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불확실성 속에서, 기업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대규모 투자보다는
당장 눈앞의 이익을 최대한 빨리 뽑아내는 단기적인 ‘약탈적 채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글을 개간하고,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며, 항만 시설을 짓는 것과 같은
막대한 초기 투자가 필요한 석유 산업의 특성상,
이러한 제도적 불안정성은 산업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이처럼, 규칙이 부재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환경은 국가와 기업 모두에게 손해였습니다.
국가는 정당한 세금을 걷지 못해 부패한 소수만 배를 불렸고,
기업은 안정적인 투자를 할 수 없어 산업의 장기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2부: 독재가 가져온 역설적 안정 – ‘규칙’의 탄생 (1908-1935)
이 혼란을 잠재우고 석유 산업을 본궤도에 올린 것은,
역설적이게도 1908년부터 35년간 베네수엘라를 철권 통치한
후안 비센테 고메스라는 강력한 독재자였습니다.
그의 장기 집권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했지만,
동시에 예측 불가능했던 베네수엘라에 안정이라는,
석유 산업 발전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자산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고메스는 이전의 통치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석유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부의 원천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했고,
이 산업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는 외국 석유 회사들을 단순히 약탈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국가 발전을 위한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베네수엘라는 처음으로 석유 산업을 규율하는
현대적인 법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22년의 석유법은, 비록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모든 계약에 최소한의 공통된 규칙을 적용하려는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 시기, 고메스 정부가 취한 정책의 핵심은 ‘당근’이었습니다.
그는 외국 기업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당장의 세금을 조금 더 걷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국가에 훨씬 더 큰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비로소 안심하고 막대한 자본과
당시로서는 최첨단이었던 기술을 베네수엘라에 투입하여,
광대한 늪지대와 정글에 흩어져 있던 유전들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3부: 위대한 이정표 – 1943년 탄화수소법의 모든 것
고메스 독재가 끝나고 점진적인 민주화가 진행되던 1943년,
베네수엘라 석유 역사의 흐름을,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이정표가 세워집니다.
바로 탄화수소법(Hydrocarbons Law)의 제정입니다.
이 법은 단순히 새로운 세금 몇 개를 추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석유 산업을 둘러싼 국가와 기업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한 대타협이자,
이후 수십 년간 베네수엘라 번영의 초석이 된 제도적 걸작이었습니다.
탄화수소법의 핵심 내용: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
1943년 법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이전까지 계약마다 제각각이었던 세금과 이권에 대한 모든 규칙을,
투명하고 통일된 하나의 법으로 명문화했다는 점입니다.
통일된 계약 조건
이 법은 베네수엘라에서 활동하는 모든 석유 회사들이
동일한 법의 적용을 받도록 규정했습니다.
더 이상 특정 회사에 대한 특혜나 비밀 계약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50대 50′ 원칙의 확립
법의 핵심적인 내용은, 석유 개발로 발생한 총이익을
국가와 기업이 정확히 절반씩 나누어 갖는다는 원칙을 암묵적으로 확립한 것입니다.
이는 세금과 소득세를 조합하여,
최종적으로 정부의 몫이 기업의 순이익과 거의 같아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 원칙은 이후 전 세계 자원 부국들의 석유 계약 모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장기적인 안정성 보장
법은 기존의 모든 낡은 계약들을 새로운 법의 틀 안으로 편입시키는 대신,
기업들에게 40년이라는 장기적인 개발권을 보장해주었습니다.
이는 기업들에게 “적어도 40년 동안은 이 규칙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신뢰를 주었고, 그들이 안심하고 천문학적인 규모의 장기 투자를
단행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습니다.
왜 이 법이 그토록 중요했는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중요합니다.
명확하고 안정적인 규칙이 제공되자, 투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석유 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순식간에 세계 3위의 산유국이자 최대 석유 수출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이 황금시대의 경험은 우리에게 첫 번째 교훈을 줍니다.
자원 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의 이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를 유인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정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은 또한 국가 재정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정부는 이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막대한 세금을 걷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돈이, 이후 베네수엘라를 현대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프로젝트의 자금줄이 되었습니다.
4부: ‘석유를 심자’ – 부의 현명한 사용
1943년 법이 부의 창출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면,
이 시기 베네수엘라 엘리트들 사이에서 공유된 석유를 심자(Sembrar el Petróleo)는
부의 사용에 대한 국가적 철학이었습니다.
저명한 지식인이었던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Arturo Uslar Pietri)가 처음 제시한 이 아이디어는,
단순한 구호를 넘어 베네수엘라의 미래를 설계하는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철학의 핵심
“석유는 금과 같다.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마법 같은 부이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고갈될 유한한 자원이다.
우리는 이 석유를 단순히 소비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농부가 씨앗을 심어 미래의 수확을 기약하듯,
국가의 영구적인 자산을 만드는 데 사용해야 한다.”
구체적인 실천
이 철학에 따라, 정부는 석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국가의 근본적인 생산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적으로 투자했습니다.
물리적 자본
전국을 잇는 도로망, 거대한 수력 발전소, 항만과 공항 등,
국가 경제의 뼈대가 되는 핵심 인프라가 바로 이 시기에 대대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인적 자본
국민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학교와 병원이 지어졌고,
공교육과 공공 의료 시스템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금융 자본
안정적인 경제 환경 속에서 건전한 금융 시스템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즉, 이 시기의 베네수엘라는
부의 창출 메커니즘(안정적인 석유법)과 부의 현명한 사용 철학(석유를 심자)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엔진을 동시에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네수엘라 석유 역사의 황금시대를 가능케 한 핵심적인 비결이었습니다.
5부: 운명적 전환점 (1958-1973) – ‘보존’이라는 이름의 위험한 이념
1958년, 길었던 군부 독재가 끝나고 베네수엘라에 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정치적 전환은, 석유 정책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방향 전환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새롭게 집권한 민주 정부의 지도자들은 과거 독재 정권이 외국 석유 회사들에게
국가의 부를 헐값에 팔아넘겼다는 강한 피해의식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외국 기업들은 국가의 신성한 자원을 약탈해가는 탐욕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분노 속에서, ‘석유를 심자’는 실용적인 철학은
보존(Conservación)이라는 이념적이고 위험한 철학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습니다.
‘보존’ 철학의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석유는 고갈될 운명의 신성한 자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함부로 많이 생산해서는 안 된다.
미래 세대를 위해 최대한 아껴두어야 하며,
지금 파내는 한 방울의 석유에서는 국가가 가능한 한 최대의 몫을 가져와야 한다.”
이 이념은 두 가지 구체적인 정책으로 나타났습니다.
정책 1: 무자비한 증세와 이익 환수
정부는 외국 석유 회사들에게 부과하는 세금과 로열티를 경쟁적으로 인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석유 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정책 2: “더 이상의 이권은 없다(No More Concessions)”
정부는 더 이상 외국 기업에게 새로운 유전 개발권을 내주지 않을 것이며,
1983년에 만료되는 기존의 개발권도 연장해주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외국 석유 회사들에게 “베네수엘라에서 떠나라”는 최후통첩과도 같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보존 정책이 완전히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는 국제 유가가 비교적 낮았고,
전 세계적으로 석유가 곧 고갈될 것이라는 자원 고갈론이 힘을 얻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헐값에 석유를 파는 것보다 땅속에 그대로 묻어두었다가
나중에 비싼 값에 파는 것이 더 나은 투자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었습니다.
이 정책은 베네수엘라가 더 이상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석유 투자처가 아니라는
냉정한 현실을 외면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 중동에서는 훨씬 더 적은 비용으로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거대한 유전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이미 생산 단가 측면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외국 석유 회사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한쪽에는 세금은 계속 오르고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는 베네수엘라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훨씬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석유를 퍼 올릴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땅 중동이 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명백했습니다.
그들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신규 투자를 중단하고,
기존 시설의 유지 보수마저 소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자본과 기술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베네수엘라를 떠나 중동으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1970년을 정점으로
서서히, 그러나 멈추지 않는 하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6부: 위대한 오판 (1973-1988) – 거품을 현실로 착각하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으로 촉발된 제1차 석유 파동은 국제 유가를 하늘로 쏘아 올렸습니다.
베네수엘라 정부에게, 이것은 자신들의 보존 정책이 얼마나 현명했는지를
증명하는 신의 계시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보라! 우리가 생산량을 줄이고 버티니, 결국 가격이 폭등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시장을 이겼다.”
그들은 이 전례 없는 유가 폭등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사건으로 인한
일시적인 거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새로운 현실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 위대한 오판은, 이미 잘못된 길로 가고 있던 석유 정책에
더욱 가속 페달을 밟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실패한 정책의 강화
정부는 이 성공의 경험에 도취되어,
생산량을 더욱 통제하고 석유 산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강화하는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그 정점은 1976년의 석유 산업 전면 국유화였습니다.
이제 모든 석유는 국가 기업인 페데베사(PDVSA)가 독점적으로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시장의 반응을 무시하다
베네수엘라와 OPEC 회원국들이 인위적으로 유가를 높게 유지하자,
나머지 세계는 필사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석유 소비국들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기술에 막대하게 투자하고,
석유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거대 석유 회사들은 OPEC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북해, 알래스카, 멕시코만 등지에서
새로운 유전을 찾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 중반, 이 거대한 거품은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소비 효율은 높아졌고,
OPEC 비회원국들의 새로운 석유 공급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국제 유가는 폭락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베네수엘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그들은 스스로의 생산 능력을 갉아먹고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 시장의 점유율을 경쟁국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의 경제 전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고유가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한때 현명해 보였던 보존 정책은,
결국 국가를 파멸로 이끈 가장 큰 오판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7부: ‘잃어버린 10년’ (1989-1998)과 실패한 회복
치명적인 실수였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1990년대, 베네수엘라 정부는 뒤늦게 ‘아페르투라 페트롤레라(Apertura Petrolera)’,
즉 석유 산업 개방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너무 소극적이었고, 너무 늦었습니다.
매력 없는 투자 조건
베네수엘라의 법률 체계는 여전히 과거의 보존 이념에 묶여 있었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제시된 세금 제도는 다른 경쟁국들에 비해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나쁜 사과’만 내놓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가장 유망하고 생산성이 높은 핵심 유전들은
여전히 국영기업인 PDVSA의 몫으로 남겨두고,
이미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개발 비용이 많이 드는
한계 유전(Marginal Fields)만을 개방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손님을 초대해놓고, 가장 맛있는 메인 요리는 주인이 다 먹고,
손님에게는 먹다 남은 반찬만 내놓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연히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 제한적인 개방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석유 생산량은 소폭 회복되는 데 그쳤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황금알을 낳던 거위는 이미 병들고 굶주려 거의 죽기 직전이었고,
뒤늦게 내민 모이 몇 알로는 거위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
결론: 스스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다
베네수엘라 경제 붕괴의 첫 번째 단추는,
바로 이 석유 정책의 총체적 실패에서 잘못 끼워졌습니다.
그것은 불운이나 외부 환경 탓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석유는 아껴 써야 한다”는, 겉보기에는 애국적이고 신중해 보였던 이념이
어떻게 국가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하고 비극적인 정책 실패의 역사입니다.
생산량을 통제하고 외국 자본을 배척했던 민족주의적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국가의 자존심을 세우고 정부의 수입을 극대화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유일한 성장 동력이었던 석유 산업의 생산 능력 자체를 파괴하고,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외부 충격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허약한 경제 구조를 고착시켰습니다.
그들은 황금알을 더 많이 얻기 위해 거위의 배를 갈랐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죽인 것은, 바로 미래의 황금알을 낳아줄 거위 그 자체였습니다.
국가의 유일한 수입원이자 성장 동력이었던 석유 산업이 이렇게 스스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렇게 줄어드는 수입을 가지고 국가 재정을 어떻게 운영했을까요?
그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위기에 대비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과거의 환상에 젖어 흥청망청 돈을 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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