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몰락 01] – 자원의 저주 : 남미 최고 부자에서 최빈국으로

Updated:
Published:
4 Min
[베네수엘라의 몰락 02] – 베네수엘라 망가진 인프라: 도로, 전기, 수도 – 나라를 무너뜨린 가장 쉬운 방법

1970년, 남미 최고 부국이던 베네수엘라는 왜 대륙 최악의 경제 실패 사례가 되었을까요?
단순히 나쁜 정책이나 부패한 정치인 같은 표면적인 진단만으로는 이 거대한 추락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비극은 풍부한 천연자원이 오히려 한 국가의 장기 성장을 저해하는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축복이 어떻게 재앙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비극적이고 교과서적인 사례입니다.

베네수엘라의 비극, 어디서 시작되었나

한때 베네수엘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이자
세계 20대 부국 중 하나였습니다.
1인당 GDP는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을 넘어섰고
카라카스의 거리에는 최신형 미국 자동차들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후 나라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추락합니다.
1978년부터 2001년까지 석유를 제외한 부문의 1인당 GDP는 무려 18.64%나 감소했습니다.
근로자 1인당 생산성으로 보면
그 하락폭은 35.6%에 달하는 충격적인 수치입니다.

흔한 오해들: 시장개혁 실패와 부패

흔히 베네수엘라의 몰락을 이야기할 때 시장개혁의 실패를 원인으로 꼽곤 합니다.
다른 남미 국가들이 추진했던 과감한 자유시장 개혁을
베네수엘라가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분석입니다.

하지만 이 설명은 결정적인 허점을 안고 있습니다.
1999년 기준으로 베네수엘라의 경제 개혁 지수는 멕시코나 우루과이보다도 더 자유 시장 지향적이었습니다.
개혁의 속도 역시 남미 지역의 중간 수준은 되었습니다.
단순히 개혁을 덜 해서 망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또 다른 흔한 오해는 지대 추구 행위(Rent-seeking)와 부패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시각입니다.
막대한 석유 수입이 국가에 집중되자 모두가 생산적인 활동 대신
이권을 따내기 위한 경쟁에만 몰두해 경제가 망가졌다는 논리입니다.

이 역시 역사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베네수엘라가 1920년부터 1970년까지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석유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정부의 석유 수입은 90년대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왜 그때는 부패와 지대 추구가 성장의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요?

진짜 원인: 자원의 저주와 네덜란드 병

이러한 단편적인 설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베네수엘라의 붕괴가 단일 원인이 아닌 시스템 전체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저주가 작동하는 핵심 메커니즘은 바로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입니다.

이는 1960년대 네덜란드가 북해에서 천연가스를 발견한 후
막대한 자원 수출로 통화가치가 급등하면서
오히려 다른 제조업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전반적인 경제 침체를 겪은 것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네덜란드 병의 작동 원리

이 병의 증상은 명확합니다.
첫째, 석유 같은 특정 자원의 수출이 급증하면 외화 유입이 늘어나고
이는 자국 통화의 가치를 급격히 상승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석유를 제외한 다른 모든 수출 산업은 국제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둘째, 제한된 국내의 자본과 노동력은 엄청난 수익을 내는 석유 산업과
석유로 번 돈이 몰리는 비수출 부문으로 쏠리게 됩니다.
결국 제조업과 농업 같은 전통적인 생산 기반은 서서히 고사하고 맙니다.

생산에서 분배로: 시스템의 붕괴

바로 이 지점에서 자원의 저주는 단순한 경제 현상을 넘어
국가 전체의 체질을 바꾸는 무서운 질병으로 발전합니다.
경제의 무게중심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에서
이미 존재하는 석유 파이를 나누는 분배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기업가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보다
정부 관료와의 인맥을 통해 수입 쿼터나 보조금을 따내는 데 더 열중하게 됩니다.
정치는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정책 경쟁이 아니라
석유 수입이라는 전리품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할 것인가를 둘러싼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질됩니다.

정반대의 길을 걸은 두 나라

노르웨이: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지혜

이러한 시스템적 질병을 극복한 극명한 대조 사례는 노르웨이입니다.
노르웨이 역시 1970년대 북해에서 막대한 석유가 발견된 대표적인 산유국입니다.
베네수엘라와 똑같이 자원의 저주라는 시험대에 올랐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석유 판매로 벌어들인 돈을 국내 경제에 직접 쏟아붓지 않았습니다.
대신 국부펀드를 만들어 거의 모든 석유 수입을 해외 자산에 투자했습니다.
이는 네덜란드 병을 예방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습니다.
석유 수입의 국내 유입을 차단해 자국 통화가치 급등을 막고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보호한 것입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지금 당장 써야 할 현금으로 본 반면
노르웨이는 미래를 위해 관리해야 할 자산으로 본 것입니다.
이 작은 철학의 차이가 수십 년 후 두 나라의 운명을 극과 극으로 갈라놓았습니다.

대한민국: 규율이 만든 한강의 기적

자원 빈국인 한국과 자원 부국인 베네수엘라는 1970년대에
국가 주도 중화학 공업 육성이라는 유사한 빅 푸시(Big Push)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겉보기엔 비슷했지만 그 결과는 판이했습니다.

결정적 차이는 규율(Discipline)의 유무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재벌 대기업에 금융 특혜와 시장 보호라는 당근을 주었지만
동시에 수출 실적이라는 엄격한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이 수출 지향 정책은 한국 기업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베네수엘라의 기업들은 석유 수입이라는 무한 ATM에 기대어 안일한 경영을 지속했습니다.
강력한 보호무역 장벽 뒤에 숨어 국제 경쟁력을 갖추려는 노력은 뒷전이었습니다.
이는 자원의 유무보다 그것을 활용하는 국가의 전략과 제도적 규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외딴 섬에 갇힌 경제: 생산물 공간의 황폐화

자원의 저주는 사회 전체의 DNA를 바꿉니다.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생산물 공간(Product Space)의 황폐화입니다.
생산물 공간이란 한 국가가 현재 생산하는 제품과 기술적으로 인접하여
비교적 쉽게 전환할 수 있는 다른 제품들의 집합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셔츠를 잘 만드는 나라는 축적된 기술을 활용해
비교적 쉽게 바지나 재킷 생산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석유 산업은 생산물 공간에서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있습니다.
석유 시추 기술은 자동차나 반도체를 만드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수십 년간 석유라는 단 하나의 섬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산업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들이 모두 끊어져 버렸습니다.
석유 가격이 폭락했을 때 위기를 타개할 ‘플랜 B’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네수엘라가 한번 시작된 추락을 멈추지 못하고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자원이라는 저주 : 시스템의 붕괴

결론적으로 베네수엘라의 붕괴는 특정 정책의 실패나 개인의 부패 문제를 넘어선
자원의 저주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작동 결과였습니다.
막대한 석유 수입은 네덜란드 병을 유발해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앗아갔고
경제 구조를 생산보다 분배에 치중하는 취약한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원의 저주라는 거대한 프레임과 그 작동 방식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저주가 구체적으로 베네수엘라 경제의 생산성 자체를 어떻게 좀먹어 들어갔는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베네수엘라 경제의 엔진 자체를 멈추게 한
총요소생산성(TFP) 붕괴의 미스터리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이콘아크의 모든 정보는 현명한 판단을 돕기 위한 참고 자료입니다.
저희 글을 참고하여 내린 투자 결정과 그 결과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귀속됩니다.


All information on EconArk is a reference to aid your informed judgment.
The final responsibility for any investment decisions made by referencing our content, and for their outcomes, rests solely with the investor.

READ MORE
ECONA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