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까지 우리는 베네수엘라 경제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기둥들,
즉 인프라, 금융, 인적 자본, 노동 시장, 재정, 그리고 정치와 제도까지,
그 내부의 구조적 실패를 심층적으로 해부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단순히 제도와 자본의 총합이 아닙니다.
국가는 결국 그 안을 채우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15편에서는 잠시 거시적인 붕괴의 서사에서 한 걸음 벗어나,
이 모든 과정에 또 다른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사람의 흐름,
즉 이민(Immigration)의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이민자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다” 혹은
“이민자들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민을 둘러싼 논쟁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겁고 민감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베네수엘라의 역사는, 이 질문에 대해 단순한 흑백논리를 넘어선,
매우 복잡하고도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한때 기회의 땅으로 불리며 전 세계, 특히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을 끌어당겼던 베네수엘라.
하지만 경제가 붕괴하자 이 사람의 물결은 정반대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인들은 떠나고, 그 자리를 이웃 나라 콜롬비아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들이 채웠습니다.
이 극적인 이민 구성의 변화는 베네수엘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단순히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의 숫자가 중요했을까요,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오고 갔는가가 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베네수엘라 붕괴의 또 다른 숨겨진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1부: 기회의 땅 – 베네수엘라가 이민자들의 자석이었을 때
오늘날의 현실을 생각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20세기 중반 베네수엘라는 아메리칸드림에 버금가는
베네수엘라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들의 최종 목적지였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베네수엘라로 향했습니다.
1. 유럽 이민자들의 물결
1940년대와 50년대, 베네수엘라 정부는 국가 발전에 필요한 기술과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넘쳐나는 석유 달러로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사회는 안정되어 있었으며, 새로운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유럽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이
이 물결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기술과 특성을 살려 베네수엘라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렸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주로 건설업에 뛰어들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데 기여했고,
스페인 이민자들은 요식업과 각종 기술직에,
포르투갈 이민자들은 식료품 소매업에 강점을 보이며 상권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일자리를 찾아온 노동자가 아니라,
베네수엘라라는 새로운 국가를 함께 건설하는 파트너였습니다.
2. 이민자라는 이름의 기업가
이 초기 유럽 이민자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놀라울 정도로 높은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데이터를 통해 확인된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1970년대 베네수엘라에서
외국에서 태어난 이민자가 스스로를 ‘고용주’, 즉 사업체를 운영하는 기업가라고 답할 확률은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원주민에 비해 무려 여섯 배나 높았습니다.
이는 이민자들이 단순히 남의 밑에서 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사업체를 일구고 새로운 가치와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성실한 노동자였을 뿐만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혁신가였습니다.
이들이 세운 수많은 작은 가게, 공장, 건설 회사들은
베네수엘라 경제의 모세혈관 역할을 하며 역동성을 불어넣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황금기는, 바로 이 이민자 기업가들의 활력 위에서
꽃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 거대한 역류 – 이민의 얼굴이 바뀌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사람의 물결은 거대한 역류를 맞이하게 됩니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붕괴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고,
반대로 유럽 경제는 재건에 성공하며 다시 매력적인 곳이 되자,
이민의 방향이 180도 뒤바뀌기 시작했습니다.
1. 유럽인들의 엑소더스
베네수엘라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던 유럽 이민자 1세대들은,
자신들의 자녀와 손주들에게 더 이상 베네수엘라에 머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더 나은 교육과 기회가 있는 유럽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기회의 땅이었던 베네수엘라는 이제 떠나야 할 곳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럽 이민자들의 엑소더스는 단순히 인구가 줄어드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베네수엘라 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집단이
사라지고 있었음을 의미했습니다.
단순한 두뇌 유출(Brain Drain)을 넘어
새로운 사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내던 기업가 정신의 유출(Entrepreneurial Drain)이었습니다.
경제의 활력을 만들어내던 핵심 동력 하나가
조용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콜롬비아 이민자들의 유입
유럽인들이 떠난 빈자리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나라 콜롬비아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들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콜롬비아인들의 이주는 베네수엘라가 가진 끌어당기는 힘보다는,
콜롬비아 내부의 밀어내는 힘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당시 콜롬비아는 오랜 내전과 마약 카르텔의 폭력,
그리고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콜롬비아인들이 폭력과 가난을 피해 국경을 넘어 베네수엘라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 이민 사회의 구성은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1970년대에 전체 이민자의 절반에 육박했던 유럽인의 비중은 15% 수준으로 급감했고,
3분의 1에 불과했던 콜롬비아인의 비중은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급증했습니다.
3. 다른 종류의 이민자들
문제는, 이 새로운 이민의 물결이 과거 유럽 이민자들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달랐다는 점입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온 유럽인들과 달리,
콜롬비아 이민자들의 상당수는 내전과 폭력을 피해
급하게 몸만 빠져나온 난민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자본이나 사회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기업가가 아니라, 당장의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절박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로 향한 곳은 농업, 건설, 그리고 가사 노동과 같은 저숙련 노동 시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장은, 이미 경제 위기로 고통받고 있던
베네수엘라의 가장 취약한 계층이 생계를 이어가던 곳이었습니다.
3. 경쟁인가, 창조인가? – 새로운 이민의 경제적 충격
그렇다면, 이렇게 성격이 다른 두 개의 거대한 이민 물결은
베네수엘라 원주민들의 고용 시장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매우 정교한 분석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1. 분석의 어려움
단순히 특정 산업에 이민자가 늘어났을 때 그 산업의 실업률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비교하는 것은
매우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왜냐하면, 이미 일자리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 유망한 산업으로 이민자들이 몰려갈 수도 있고,
반대로 특정 산업의 실업률이 너무 높아지자 이민자들이 그곳을 떠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가 뒤섞인 내생성 문제를 해결해야만,
이민이 고용에 미치는 진짜 인과관계를 밝혀낼 수 있습니다.
2. 본국에서 발생한 경제적 충격 분석법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매우 똑똑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이민자들의 본국에서 발생한 경제적 충격을 도구 변수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콜롬비아에 극심한 경제 위기가 닥치면,
베네수엘라의 특정 산업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더 많은 콜롬비아인들이 베네수엘라로 오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포르투갈의 경제가 갑자기 좋아지면,
베네수엘라에 있던 포르투갈 이민자들이 귀국을 결심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처럼 이민자들의 본국에서 발생한 밀어내는 힘과 끌어당기는 힘은,
베네수엘라 내부의 경제 상황과는 독립적으로 이민자 수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외부 충격을 이용하면, 다른 모든 요인을 통제하고 순수하게
이민자 수의 변화가 베네수엘라 원주민의 고용에 미친 영향만을 분리해서 측정할 수 있습니다.
3. 충격적인 분석 결과: 두 종류의 이민, 두 개의 다른 세상
이 정교한 분석이 내놓은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든 이민자가 똑같은 효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콜롬비아 이민자의 효과: 일자리 경쟁
분석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특정 산업에 콜롬비아 노동자 100명이 추가로 유입되었을 때
그 산업에 종사하던 베네수엘라 원주민의 일자리는 약 117개가 사라지거나
혹은 새로 생겨나지 않는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결과는 통계적으로 매우 유의미했으며, 그 규모도 매우 컸습니다.
이는 콜롬비아 이민자들이 주로 저숙련 노동 시장에서,
가뜩이나 일자리가 부족한 베네수엘라의 취약 계층과 직접적으로
일자리를 놓고 경쟁했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유럽 이민자의 효과: 경쟁과 창조의 상쇄
반면, 유럽 이민자들의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특정 산업의 유럽 이민자 비율 변화는, 베네수엘라 원주민의 실업률에 아무런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수치는 거의 0에 가까웠습니다.
4.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 ‘기업가 정신’이라는 숨겨진 열쇠
왜 이런 극적인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1부에서 살펴보았던
기업가 정신이라는 숨겨진 열쇠에 있습니다.
유럽 이민자들 역시 베네수엘라 원주민들과 일부 일자리를 놓고 경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스스로 사업체를 세우는 기업가였습니다.
이탈리아인 이민자 한 명이 작은 건설 회사를 차리면,
그는 베네수엘라 현지인 인부 5명, 회계 담당자 1명, 운전기사 1명을 고용했을 것입니다.
즉, 그 한 명의 이민자는 7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 셈입니다.
이 강력한 일자리 창출 효과가 그들이 유발했을지 모를 약간의
일자리 경쟁 효과를 완전히 상쇄하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반면, 주로 일자리를 찾아온 콜롬비아 이민자들에게서는
이러한 일자리 창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주로 기존의 한정된 노동 시장에 공급을 늘리는 역할을 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임금 하락 압력과 고용 경쟁 심화로 이어졌습니다.
결론: 보이지 않는 비용, 변해버린 사람의 물결
베네수엘라의 이민 이야기는,
국가 붕괴의 또 다른 비극적인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문제는 단순히 이민자의 수가 아니라, 이민의 성격과 구성이 얼마나 중요한가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실
1980년대 이후, 베네수엘라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유럽인 인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 경제에 역동성과 새로운 일자리를 불어넣던
기업가 집단을 조용히, 그러나 체계적으로 상실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장기적인 생산 능력에 가해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우 심각한 타격이었습니다.
고통의 가중
동시에, 붕괴하는 경제와 경직된 노동 시장이라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 유입된
새로운 저숙련 이민의 물결은, 이미 고통받고 있던 사회 최하층의 생존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고 사회적 갈등의 소지를 키웠습니다.
물론, 이민의 변화가 베네수엘라 붕괴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진행 중이던 위기, 즉 붕괴하는 경제, 경직된 노동 시장,
심화되는 빈곤과 상호작용하며, 고통을 증폭시키고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가속 변수로 작용했습니다.
사람의 물결이 바뀌자, 국가의 운명도 함께 흔들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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