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몰락 08] – 우고 차베스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 좌파와 군부의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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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몰락 07] – 카라카소 사태로 본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붕괴의 서막[베네수엘라의 몰락 09] – 베네수엘라 경제 몰락의 시작: 가격 통제와 외환 통제 정책

1998년 12월, 베네수엘라는 숨을 죽였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한 남자가 등장했습니다.

군복을 입었던 전직 쿠데타 주모자, 이제는 양복을 입은 대통령 당선인, 우고 차베스.
그의 승리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40년간 베네수엘라를 지배해 온 하나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사망했음을 알리는 선고였습니다.

지난 편에서 우리는 1989년의 민중 봉기부터 1993년의 대통령 탄핵까지
한때 남미 민주주의의 모범이었던 푼토피호 체제가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며 정치적 폐허로 변해갔는지 목격했습니다.

엘리트 간의 신뢰는 깨졌고 정당들은 국민의 믿음을 잃었으며
베네수엘라 전체는 기존 정치에 대한 깊은 환멸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이 거대한 정치적 공백과 혼돈의 끝에서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새로운 구원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차베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차베스라는 한 개인의 일대기를 추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왜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대안은 하필이면
급진 좌파 지식인과 국가주의 군부의 결합이라는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기이한 형태로 나타났을까요?

차베스 현상의 탄생을 이해하는 것은 베네수엘라 붕괴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명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등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베네수엘라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자라난 특정 세력들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한, 어쩌면 정해진 수순과도 같은 결과였습니다.

1부: 흔한 오해를 넘어서 – 왜 하필 차베스였는가?

차베스의 등장을 설명하는 가장 흔하고 단순한 논리는 가난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입니다.
하지만 이 설명들은 왜 우고 차베스라는 특정한 형태의 리더십이 등장했는지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가난 때문이었다”는 설명의 한계
의심의 여지 없이 1980년대 이후 지속된 극심한 경제난과 빈곤의 확산은
국민적 분노를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난은 마른 장작과 같습니다.
불이 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지만 그 자체로 불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불을 붙일 불꽃과 그 불꽃을 키울 바람이 필요합니다.
왜 하필 1998년에 그리고 왜 하필 군인 출신 급진 좌파라는
독특한 형태의 불꽃이 타올랐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가난은 변화의 필요조건이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설명의 한계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여기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란 1980~90년대 유행했던 경제 사상으로
아주 쉽게 말해 “정부는 시장에 간섭하지 말고 빠져라”는 생각입니다.

국가가 운영하던 공기업은 민간에 팔고(민영화) 기업 활동을 옥죄는 규제는 풀며(규제 완화)
외국과의 무역 장벽을 허물어(무역 자유화)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경제를 살리자는 것입니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이 남미 국가들에게 요구했던 정책 패키지
이른바 워싱턴 합의 (Washington Consensus)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마치 빚더미에 앉은 가족에게 지금 당장 차를 팔고
아이들 보험을 해지하며 옆집 대형마트와 경쟁해서 돈을 벌어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1990년대 초 페레스 정부가 이와 유사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국민적 저항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분노는 신자유주의라는 특정 이념보다는
10년간 이어진 정책적 혼돈, 끝없는 부패, 그리고 경제 실패 그 자체를 향한 훨씬 더 근본적인 절망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베네수엘라를 40년간 지배했던 푼토피호 체제라는 독특한 시스템이
어떻게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인큐베이터가 되었는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2부: 역설의 인큐베이터 – 구체제는 어떻게 자신의 적을 키웠나

푼토피호 체제란 이전 편에서 다루었듯 1958년 베네수엘라의 주요 정당들이
“다시는 서로 싸우다 군부에게 정권을 빼앗기지 말자”고 맺은 엘리트 간의 평화 협정입니다.

마치 거대한 기업의 지분을 나눠 가진 대주주들처럼
그들은 석유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을 자기들끼리 나눠 가지며 40년간 안정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고 차베스를 구성한 핵심 세력들은 이 체제에 의해 핍박받은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푼토피호라는 구체제가 제공한 가장 안락하고 특권적인 온실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안전하게 성장했습니다.

인큐베이터 01: 급진 좌파의 성역, 국립대학교
1960~70년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대학들이 우파 군부 독재에 의해 피로 물들었을 때
베네수엘라의 국립대학교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푼토피호 체제는 과거 게릴라 활동을 벌였던 좌파 세력들을 끌어안는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대학에 거의 절대적인 자치권을 부여하고 막대한 재정을 지원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좌파를 사냥하고 있을 때 베네수엘라는 국가의 돈으로
좌파에게 연구실과 월급을 주며 그들을 보호한 것입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 국립대학교는 급진 좌파의 해방구이자 혁명 사상의 인큐베이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급진 좌파(Radical Left)란 단순히 복지를 늘리고 세금을 더 걷자는 수준의
온건한 사회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온건 좌파는 자본주의라는 집은 그대로 두되
내부 인테리어를 바꿔서 가난한 사람도 살기 좋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반면 베네수엘라의 급진 좌파는 이 낡고 불평등한 자본주의라는 집 자체를 허물고
그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라는 건물을 짓자는, 즉 체제 전복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라틴 아메리카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던 종속 이론을 신봉했습니다.

이러한 급진 사상의 중심에 바로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UCV)와
그 산하의 개발연구센터(CENDES)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차베스 정권의 경제 정책을 설계한 핵심 인물인 호르헤 히오르다니 같은 인물들의 아지트였습니다.
그들에게 대학은 탄압을 피해 사상을 연마하고 다음 세대의 혁명가들을 길러낼 수 있는 완벽한 안전가옥이었습니다.
구체제는 자신의 돈으로, 자신의 심장을 겨눌 이념적 칼날을 단련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을 수십 년간 방치했던 것입니다.

인큐베이터 02: 소외된 수호자, 군부
차베스 현상의 또 다른 한 축인 군부 역시 푼토피호 체제라는 온실 속에서 독특하게 길러졌습니다.
1958년 민주화 이후 정치 엘리트들은 군부를 정치에서 배제하는 대신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막대한 당근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최고위 장성들은 정치권과 결탁하여 부패를 저지르며 부를 축적했지만
대다수 젊은 장교들과 사병들은 정체된 월급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1960년대 좌파 게릴라가 소탕된 이후 베네수엘라 군대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바로 이 틈을 파고든 것이 우고 차베스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시절부터 역사와 정치철학에 심취한 지식인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과 비밀리에 볼리바르 혁명 운동-200 (MBR-200)을 조직하고
그들만의 독특한 이념 체계인 세 개의 뿌리를 가진 나무(El Árbol de las Tres Raíces)를 발전시켰습니다.

첫째 뿌리는 남미 해방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에게서 가져온 국가 주권과 반제국주의 정신입니다.
둘째 뿌리는 볼리바르의 스승 시몬 로드리게스에게서 배운 민중을 깨우는 급진적 교육의 중요성입니다.
셋째 뿌리는 19세기 농민 반란 지도자 에세키엘 사모라에게서 흡수한 토지 분배와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적 가치입니다.

이처럼 차베스는 단순한 국가주의를 넘어
역사적 정당성과 구체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혁명가 집단을 군대 내부에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3부: 이질적 동맹의 탄생 – 좌파와 군부는 어떻게 손을 잡았나

1990년대 후반 베네수엘라에는 두 개의 강력한 반체제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대학을 중심으로 성장한 혁명의 설계자 그룹과 군대 내부에서 성장한 혁명의 행동대장 그룹.
어떻게 이 이질적인 두 세력이 하나의 동맹을 맺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을 묶어준 가장 강력한 접착제는 바로 공동의 적에 대한 혐오였습니다.
그들은 푼토피호 체제를 지칭하는 경멸적인 단어 코고요스(Cogollos, 야채의 썩은 속대)를 함께 공격했습니다.

지식인들은 그들을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으로 보았고
군인들은 국가의 명예를 더럽히는 무능하고 부패한 민간인 집단으로 보았습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달랐을지 몰라도

‘무엇을 파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완벽한 합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우고 차베스라는 인물은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완벽한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혁명 사상가로 여기는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1992년 쿠데타 실패 후 수감되었을 때 그는 감옥에서 수많은 좌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혁명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결국 경제 위기와 정치적 혼란으로 구체제가 무너져 내리자
수십 년간 각자의 온실 속에서 힘을 키워온 이 두 세력은
차베스라는 구심점 아래 극적으로 결합하여 유례없는 급진 좌파-군부 동맹 정권을 탄생시켰습니다.

결론: 예고된 혁명

우고 차베스의 등장은 결코 우연이나 한 개인의 카리스마가 만들어낸 돌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베네수엘라만의 독특한 시스템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푼토피호 체제는 안정을 위해 경쟁을 억제하고 타협을 위해 석유 수입을 남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체제 내부의 가장 특권적인 기관들 안에서
자신의 무덤을 팔 세력들을 스스로 키워냈습니다.

1990년대 경제 위기로 기존 정당들이 신뢰를 잃고 무너져 내렸을 때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어설픈 신생 정당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이념적으로 무장하고 조직적으로 준비된 두 개의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차베스의 등장은 혁명이라기보다는, 낡고 텅 빈 집을 준비된 새로운 주인이 차지하는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권력을 잡은 이 새로운 주인 즉 급진 좌파-군부 동맹은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구체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베네수엘라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통치 방식과 경제 정책은 과연 자원의 저주를 치유하는 해독제였을까요
아니면 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더 강력한 독극물이었을까요?

다음 9편에서는 집권 초창기 차베스 정부가 꺼내든 경제 정책들을 분석하며
그들이 과연 베네수엘라를 붕괴의 늪에서 구해낼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또 다른 재앙을 예고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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