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베네수엘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휴고 차베스 정부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약속하며
수십 년간의 경제 붕괴와 정치 혼란의 폐허 위에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그들의 진단은 명쾌했고, 약속은 강렬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부는 소수의 부패한 과두 지배층에게 도둑맞았다.
이제 국가가 그 부를 되찾아 대다수 인민에게 돌려주겠다.”
이 새로운 경제 실험은 과연 베네수엘라를 수십 년간 옭아매 온
자원의 저주와 부패의 늪에서 구원할 혁명적인 해법이었을까?
아니면,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킨 더 치명적인 실패였을까?
이 글은 차베스 집권 초기의 핵심 경제 정책들을 심층적으로 해부하고
그 정책들이 베네수엘라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분석합니다.
1부: 차비스타의 진단 – “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분배다”
모든 정책은 현실에 대한 진단에서 출발합니다.
차베스 정부가 베네수엘라 경제에 내린 진단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명쾌하며
대중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강력한 서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둑맞은 부’라는 강력한 서사
차베스의 핵심 진단은 이것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본래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다.
그런데 왜 국민들은 가난한가? 그 이유는 소수의 부패한 엘리트, 즉 지배층(Oligarchy)이
그들의 외국인 주인(미국 제국주의)들이 지난 수십 년간 국가의 부를 모두 훔쳐갔기 때문이다.”
이 서사는 강력했습니다.
수십 년간 경제적 고통에 시달려온 대다수 국민들에게
그들의 가난이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복잡한 경제 구조 때문이 아니라
명확하게 규정된 외부의 적 때문이라는 설명은
심리적으로 큰 위안과 함께 명확한 분노의 대상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진단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해결책은 훨씬 더 간단하고 직접적이었습니다.
바로 국가의 강력한 힘을 동원하여 소수의 도둑들에게서 부를 빼앗아
대다수 가난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즉 부의 재분배였습니다.
파이 키우기에서 파이 나누기로의 전환, 그리고 치명적 오진
이 진단은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했습니다.
경제학의 파이 비유에서 국가 총생산은 하나의 커다란 파이입니다.
경제 정책은 파이 자체의 크기를 키우는 성장 정책과
이미 만들어진 파이를 어떻게 나눌지 결정하는 분배 정책으로 나뉩니다.
이전의 정부들이 이론적으로나마 ‘어떻게 하면 파이를 더 크게 만들까?’를 고민했다면
차베스 정부의 관심은 오직 ‘누가 이 파이를 잘라야 하는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시각에서 파이는 이미 석유 덕분에 충분히 거대했습니다.
문제는 칼자루를 쥔 소수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접시에만 파이를 가득 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순 명쾌한 진단은 우리가 지난 편들에서 살펴본
베네수엘라의 진짜 병세를 완전히 외면한 치명적인 오진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진짜 문제는 파이를 나누는 방식이 불공정했다는 점을 넘어
수십 년간의 방치로 파이를 만드는 오븐(국가 인프라)이 녹슬고
제빵사의 기술(민간 부문의 생산성)이 형편없어졌으며
밀가루를 공급하는 혈관(금융 시스템)이 막혀버려 파이 자체가 딱딱하게 굳고 썩어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자 리카르도 하우스만과 대니 로드릭이 지적했듯
베네수엘라의 근본적인 문제는 생산요소를 효율적으로 결합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능력
즉 총요소 생산성의 붕괴에 있었습니다.
차베스는 이 근본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대신
그저 썩어가는 파이를 다시 나누는 데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2부: 신의 선물인가, 악마의 속삭임인가? –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석유 호황
이처럼 명백한 오진에 기반한 처방이 어떻게 한동안 기적의 치료법처럼 보일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실력이 아닌 운, 즉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한 행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차베스가 집권한 1999년을 기점으로 거의 20년간 바닥을 기던 국제 유가가 거짓말처럼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배럴당 10달러 수준이었던 유가는 2008년 140달러를 돌파하며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 시기 베네수엘라의 교역 조건은 무려 7배나 상승했습니다.
교역 조건이란 한 나라가 수출하는 상품 1단위와 교환할 수 있는 수입 상품의 양을 의미합니다.
베네수엘라가 파는 석유의 가격은 폭등했고 그들이 사들이는 공산품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습니다.
똑같은 석유 한 통을 팔아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석유 호황은 차베스 정부에게 무한정 쓸 수 있는 돈을 안겨주었습니다.
차베스 집권 기간 동안 베네수엘라가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돈은
약 1조 달러, 한화 약 1,30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천문학적인 돈은 차베스 정부의 모든 정책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조력자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는 이 돈으로 국가의 근본적인 생산 능력을 키우는 어려운 길 대신
당장 국민들에게 현금과 서비스를 나누어주는 쉽고 인기 있는 길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한동안 이 정책은 정말로 기적처럼 보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부가 나눠주는 돈으로 음식을 살 수 있었고 무상 의료와 교육의 혜택을 누렸습니다.
유엔 자료에 따르면 2002년 48.6%에 달했던 빈곤율은 2012년 25.4%까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차베스 모델의 성공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역사상 유례없는 석유 달러의 홍수가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했을까?
3부: 차비스타의 처방전 – 과거의 실패를 더 극단적으로 반복하다
차베스 정부가 내놓은 구체적인 경제 정책 처방전들을 하나씩 해부해 보면
우리는 그것이 혁명이라는 이름표를 달았을 뿐
실제로는 과거 베네수엘라를 망쳤던 정책들을 더욱 극단적이고 전면적으로 반복한 것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방 01: 국가 만능주의 – 모든 것을 국가의 손에
차베스 정부는 민간 부문을 철저히 불신하고 국가가 경제의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국가의 몸집은 비정상적으로 커졌습니다.
GDP에서 정부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 28.8%에서 2012년 41.1%로 급팽창했습니다.
정부는 전력, 통신, 시멘트, 철강, 은행 등 국가 경제의 핵심 민간 기업들을 강제로 국유화했습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약 1,168개의 국내외 기업이 국유화되거나 몰수당했습니다.
이는 결국 관료주의의 팽창, 비효율의 극대화, 그리고 부패의 온상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처방 02: 가격 통제와 환율 통제 – 1980년대의 악몽 재현
2003년 차베스 정부는 치솟는 물가를 잡고 자본 유출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가장 손쉽지만 가장 파괴적인 두 가지 정책, 즉 가격 통제와 외환 통제를 꺼내 들었습니다.
정부는 수백 가지 생필품의 판매 가격을 법으로 정해놓고 그 이상으로 팔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과는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그대로였습니다.
생산자들은 생산을 중단하거나 상품을 암시장으로 빼돌렸습니다.
소비자들은 사재기에 나섰습니다.
결국 시장에서 물건이 사라졌고 슈퍼마켓의 선반은 텅 비었습니다.
가격 통제는 물가를 잡기는커녕 대규모 물품 부족 사태와 암시장 창궐이라는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낳았을 뿐입니다.
외환 통제 시스템의 핵심은 CADIVI라는 기관이었습니다.
정부는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매우 낮게 고정시키고
인맥이 있는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이 공식 달러를 배정했습니다.
이들은 배정받은 달러를 암시장에 내다 팔아 앉은 자리에서 수 배의 이익을 챙겼습니다.
이로 인해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수익성 좋은 사업은 공장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정부 관료에게 뇌물을 주고 공식 달러를 배정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경제학자 스티브 행크는 이 제도를 역사상 가장 거대한 부패 메커니즘 중 하나라고 평가했습니다.
처방 03: 민간 부문 공격 –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다
차베스 정부는 민간 기업과 기업가들을 국민의 적, 착취하는 과두 지배층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공격했습니다.
수많은 기업과 농지가 사회적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강제로 몰수되었습니다.
이는 한 국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무형 자산, 즉 투자 심리와 재산권을 완전히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어떤 기업가가 정부가 언제든지 자신의 공장이나 농장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새로운 투자를 결심할 수 있을까요?
결국 베네수엘라에서는 새로운 투자가 완전히 실종되었고 기존 기업들마저 해외로 떠났습니다.
이는 건강한 경제에서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을 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스스로 가른 것과 같았습니다.
처방 04: ‘미션’ 프로그램 – 복지인가, 정치적 매수인가?
차베스 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정책은 미션이라 불리는 대규모 사회 복지 프로그램들이었습니다.
빈민 지역 무상 의료, 저가 식료품 공급, 문맹 퇴치 교육 등
이 프로그램들은 단기적으로 빈곤율을 낮추는 데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운영 방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미션들은 기존 정부 부처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통제하는 별도의 조직을 통해 운영되었습니다.
이는 투명한 예산 집행과 책임성 있는 정책 평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회 복지 프로그램들은 보편적인 복지 제도를 구축하기보다는
정권의 지지자들에게 혜택을 집중하는 강력한 정치적 고객 관리 도구로 변질되었습니다.
복지는 더 이상 시민의 권리가 아니라 정권이 베푸는 시혜이자 충성심을 확인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결론: 질병보다 더 치명적이었던 처방
결론적으로 혁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된 차베스 정부의 경제 처방은
베네수엘라의 깊은 병을 치료하는 해독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 주도, 석유 의존, 반시장, 포퓰리즘적 분배라는
과거 베네수엘라를 병들게 했던 바로 그 독성 물질들을 더욱 강력하게 농축하여 환자에게 주입한 것과 같았습니다.
2000년대의 전례 없는 석유 호황은 이 독극물의 치명적인 효과를 잠시 가려주는 강력한 마취제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는 넘쳐나는 돈으로 대규모 소비를 진작시키고 빈곤율을 낮추면서
마치 경제가 살아나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환상의 이면에서는 경제의 진짜 생산 능력
즉 인프라, 금융 시스템, 민간 부문의 활력, 법치주의와 같은 핵심 장기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그리고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청구서는 유가가 다시 폭락했을 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참혹한 형태의 국가 붕괴라는 모습으로 날아들게 됩니다.
다음 10편에서는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대격변이 평범한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 자체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즉 ‘붕괴의 심리학’을 탐구해보겠습니다.
수십 년간의 혼란과 선동은 어떻게 국민들의 마음속에 불신과 증오를 심고
합리적인 사회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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