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몰락 06] – 배제된 자들의 분노가 어떻게 체제를 무너뜨렸나 :포퓰리스트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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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몰락 05] – 노동법이 어떻게 경제를 파괴하는가: 선한 의도의 역설[베네수엘라의 몰락 07] – 카라카소 사태로 본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붕괴의 서막

왜 베네수엘라의 정치 시스템은 명백한 파국을 막지 못했을까?
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희망으로 불렸던 베네수엘라 민주주의는
어떻게 스스로 붕괴하는 비극을 맞이했을까?

그 비밀은 베네수엘라 민주주의의 탄생 비화,
푼토피호 체제라 불리는 독특한 정치적 합의의 영광과 몰락에 있습니다.

지난 5편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베네수엘라 경제라는 거대한 환자의 내부 장기들을 하나씩 해부했습니다.
자원의 저주, 인프라 붕괴, 금융 마비, 인적 자본의 실패, 그리고 노동 시장의 경화증까지.
우리는 이 환자의 모든 신체 기관이 망가지는 과정을 목격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붕괴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국가의 운영체제인 정치와 제도의 문제와 마주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 정치 시스템 자체가 이 모든 붕괴를 방치하고 심지어 조장한 것은 아닐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베네수엘라 현대 민주주의가 태동하던 순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놀랍게도 1960년대와 70년대, 라틴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군부 쿠데타와 독재의 악순환에 빠져 있을 때
유독 한 나라만이 안정적인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을 누리며 대륙의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베네수엘라였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이 베네수엘라 예외주의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입니다.

1부: 트라우마가 낳은 민주주의 – 트리에니오의 유령

1958년에 탄생한 푼토피호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10년 앞선 1945년으로 돌아가
베네수엘라 정치 엘리트들이 겪었던 끔찍한 트라우마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1945년, 베네수엘라는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실험, 트리에니오 아데코 시대를 맞이합니다.
당시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로 집권한 민주행동당(AD)은
외국 석유 회사에 대한 세금 대폭 인상, 대대적인 토지 개혁 등
수십 년간 누적된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매우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압도적인 의석수를 믿었던 민주행동당은 다른 정치 세력이나 기득권층과의 합의와 타협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 보수적인 기업가 집단, 그리고 무엇보다 군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습니다.

결국 이 첫 번째 민주주의 실험은 개혁의 내용이 아니라
일방적인 개혁의 방식에 대한 격렬한 반발에 부딪혀 1948년 군부 쿠데타로 허무하게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후 10년간 베네수엘라는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라는 군부 독재자의 철권 통치 아래 암흑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1958년, 독재가 무너지고 다시 민주주의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정치 지도자들의 뇌리에는 이 트리에니오의 유령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은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급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안정이며
안정을 위해서는 적을 만들지 않고 모든 주요 세력을 끌어안는 타협과 합의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시는 트리에니오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이 절박한 공감대가 바로 베네수엘라 민주주의의 독특한 DNA를 형성한 출발점이었습니다.

2부: 푼토피호 협정 – 악수로 맺은 그들만의 리그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1958년 베네수엘라 3대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이
라파엘 칼데라의 자택 푼토피호에 모여 역사적인 협정을 맺습니다.
민주행동당(AD)의 로물로 베탕쿠르, 기독교민주당(COPEI)의 라파엘 칼데라,
민주공화연맹(URD)의 호비토 비얄바가 그들이었습니다.

이 협정의 핵심 목표는 단 하나, 안정적인 민주주의의 유지였습니다.

1. 낮은 판돈의 정치: 패배해도 죽지 않는 게임

푼토피호 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설계 철학은 정치 게임의 판돈을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트리에니오 시대처럼 선거에서 승리한 쪽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패배한 쪽은 모든 것을 잃는 제로섬 게임이 되면
패자들은 결과에 불복하고 쿠데타와 같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선거에서 지더라도 정치적으로 죽지 않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서로에게 심어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파르티도크라시아(Partidocracia, 정당지배체제) 구축
이 시스템의 핵심은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정당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1961년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금지하고 권한을 의도적으로 약화시켰습니다.
대신 실질적인 권력은 정당 지도부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정치학자 마이클 코페지는 그의 저서 강한 정당과 절름발이 오리에서 이 현상을 탁월하게 분석했습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CEO라기보다는 거대 프랜차이즈 본사의 방침을 충실히 따라야 하는 잘나가는 지점장과 같았습니다.
후보자 공천권과 자금줄을 쥔 정당 본부가 의원들을 완벽히 통제했기 때문에
대통령조차 당의 방침을 함부로 어길 수 없었습니다.

코포라티즘(Corporatism, 조합주의) 도입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의 주요 세력들도 체제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한국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떠올리면 이해가 아주 쉽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정부, 베네수엘라 최대의 경영자 총연합회(Fedecámaras),
그리고 최대 노동조합 총연맹(CTV)이라는 세 축이 정책 결정 과정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잠재적인 사회 갈등을 제도권 안에서 관리하고 통제하는 효과적인 메커니즘이었습니다.

2. 석유라는 이름의 위대한 윤활유와 지대 추구 국가의 탄생

이처럼 섬세하고 복잡한 합의의 톱니바퀴들이 부드럽게 돌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결정적인 윤활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석유에서 나오는 막대한 부였습니다.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유가가 폭등하자
베네수엘라의 정부 수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불어났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베네수엘라는 지대 추구 국가라는 그 운명을 결정지을 치명적인 길로 들어섭니다.
이 개념은 스탠퍼드 대학의 저명한 정치학자 테리 린 칼
그녀의 명저 풍요의 역설에서 제시한 이론으로 베네수엘라 비극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열쇠입니다.

지대 추구 국가란 아주 쉽게 말해 땀 흘려 일해서 버는 돈이 아니라
건물주가 받는 월세로 먹고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월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땅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석유입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계약, 즉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원칙을 파괴했습니다.
정부는 국민에게 세금을 걷어 나라를 운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국민에게 책임지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국민은 국가 재정을 감시하는 주인이자 주권자가 아니라
정부가 나눠주는 공돈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고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3부: 푼토피호의 황금시대 (1958-1978) – 시스템은 작동했다

이 독특한 정치 시스템은 실제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푼토피호 체제가 확립된 이후 약 20년간 베네수엘라는 황금시대를 맞이합니다.

정치적으로는 극도의 안정을 이루었고 경제적으로도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세계은행 데이터에 따르면 1970년대 베네수엘라의 1인당 GDP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단연 최고였으며
당시 남유럽의 스페인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이 시기에 국가는 안정적인 재정을 바탕으로 고속도로, 항만, 발전소와 같은 거대한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국민들의 교육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습니다.
푼토피호 체제는 분명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4부: 붕괴의 씨앗 – 황금 새장에 내재된 치명적인 결함들

하지만 역사에는 영원한 황금시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비극은 바로 이 성공적인 시스템 안에
이미 붕괴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결함 01: 그들만의 리그 – 정치 카르텔의 형성

푼토피호 협정은 본질적으로 소수 엘리트 간의 거래였습니다.
정치학자 하비에르 코랄레스는 이 체제를 사실상의 정치 카르텔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는 두 개의 거대 정당(AD와 COPEI)이 마치 시장을 독점한 대기업들처럼
새로운 경쟁자의 진입을 막고 자기들끼리만 이익을 나눠 먹는 구조를 형성했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그들만의 리그 밖의 사람들은 극심한 소외감과 분노를 느끼게 되었고
이는 훗날 기존 질서 전체를 불태워버릴 강력한 포퓰리스트가 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결함 02: 석유 중독과 클리엔텔리즘의 만연

지대 추구 국가의 필연적인 결과는 클리엔텔리즘(Clientelism, 후견주의)의 만연이었습니다.
클리엔텔리즘이란 정치인이 정책과 비전으로 지지를 얻는 대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정부 일자리, 보조금, 사업 계약 같은 특별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표를 받는 관계를 말합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이것이 국가 전체 단위에서 벌어졌습니다.
국영 석유기업(PDVSA)을 비롯한 수많은 공기업은 능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는 곳이 아니라
정당 지지자들에게 일자리를 나눠주는 정치적 전리품으로 전락했습니다.


정치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경쟁이 아니라 “누가 내 편을 더 잘 챙겨주나”의 경쟁으로 변질되었고
국가 전체는 비효율과 부패의 늪에 빠졌습니다.

결함 03: 변화에 대한 적응 능력 상실 – 결정 마비 상태

아마도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푼토피호 체제가 변화에 대응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이 시스템은 자원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전제 하에
즉 넘치는 파이를 나누는 것에 최적화된 시스템이었습니다.

모든 주요 세력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극도로 경직된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국제 유가가 폭락하며 시스템의 근간이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쪼그라든 파이를 누가 더 적게 잃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조금 삭감, 공기업 구조조정
환율 현실화 같은 고통스러운 개혁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정당도 어떤 이익 집단도 그 정치적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세력이 자신의 희생을 막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시스템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정치적 교착 상태(Gridlock)에 빠졌습니다.

한국 국회가 여야 대립으로 민생 법안이나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멈춰서는
식물 국회 상태를 떠올리면 정확합니다.
베네수엘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수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결론: 안정의 대가와 다가오는 폭풍

결론적으로 푼토피호 체제는 1940년대의 정치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엘리트들이 만들어낸 지혜롭고도 실용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그것은 석유라는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모든 정치 세력이
충돌 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시스템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안정의 시스템에는 치명적인 설계 결함이 있었습니다.

이 구조는 새로운 정치 세력을 배제하는 폐쇄적인 정치 카르텔을 형성했고
체제 내의 엘리트들은 지대 추구 국가의 클리엔텔리즘에 깊이 중독되었습니다.
(권력자가 특혜를 주고 그 대가로 지지나 충성을 얻는 관계)

결국 너무 많은 거부권 행사자들 때문에 변화하는 외부 환경에 적응할 유연성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1980년대, 국제 유가 폭락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자 시스템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석유 수입이 급감하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한때 모두의 안정을 보장했던 이 시스템은 이제 국가 전체를 함께 추락시키는 경직된 족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음 7편에서는 이 견고해 보이던 푼토피호 체제가 어떻게 경제 위기와 정치 개혁의 파도 속에서 극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베네수엘라가 회복 불가능한 혼돈의 시대로 빠져들게 되는지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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