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몰락 07] – 카라카소 사태로 본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붕괴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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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몰락 06] – 배제된 자들의 분노가 어떻게 체제를 무너뜨렸나 :포퓰리스트 탄생 배경[베네수엘라의 몰락 08] – 우고 차베스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 좌파와 군부의 동맹

1989년 2월, 베네수엘라 민주주의의 심장이 사실상 멎었습니다.
한때 남미의 모범이던 푼토피호 체제는 왜 10년 만에 붕괴했을까?

이 글은 경제 위기라는 쓰나미와 정치 개혁이라는 지각 변동이 충돌하며
시스템이 자멸해가는 결정적 10년을 추적합니다.

어떻게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정치 시스템이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완전히 붕괴하여 훗날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을까요?

1부: 파티는 끝났다 – 경제 쓰나미와 정치적 후폭풍

모든 붕괴의 시작은 경제였습니다.
1980년대 푼토피호 체제의 생명줄이었던 국제 유가가 끝을 모르고 추락했습니다.

1981년 배럴당 35달러에 육박했던 유가는 1986년 10달러 선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무한할 것 같았던 위대한 윤활유가 말라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대한 숙취 (The Great Hangover)
1970년대 내내 베네수엘라는 석유로 벌어들인 돈으로 거대한 파티를 벌였습니다.
정부 지출은 천정부지로 솟았고 국민들은 각종 보조금과 값싼 수입품에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유가 하락으로 수입이 급감하자 파티는 끝났고 끔찍한 숙취가 찾아왔습니다.

1983년 정부가 더 이상 환율을 방어하지 못하고
볼리바르화의 대규모 평가절하를 단행한 검은 금요일(Viernes Negro)은
파티의 끝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정부 재정은 심각한 적자에 시달렸고 1970년대에 무분별하게 빌려 쓴 외채는
350억 달러까지 불어나 국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 정치는 누가 더 많이 가질 것인가의 포지티브섬 게임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이 희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고통스러운 제로섬 게임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지난 20년간 합의와 분배에만 익숙했던 정치 엘리트들에게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생소하고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카라카소 (El Caracazo): 한 국가의 비명
1989년 2월 새로 취임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따라 긴축 재정과 가격 자유화 조치를 포함한 고강도 경제 개혁안,
이른바 그란 비라헤(El Gran Viraje, 대전환)를 발표합니다.

이 개혁안에 따라 정부는 만성적인 적자를 기록하던 휘발유 보조금을 삭감했고
이는 대중교통 요금의 즉각적인 인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도화선이었습니다.
수도 카라카스 외곽의 빈민가에서 시작된 버스 요금 인상에 대한 소박한 항의 시위는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마비시키는 거대한 폭동으로 번졌습니다.
분노한 군중은 상점과 슈퍼마켓을 약탈하고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놀란 정부는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수백, 비공식적으로는 수천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라카소 사건입니다.

베네수엘라 사회학자 마르가리타 로페스 마야가 지적했듯 카라카소는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푼토피호 체제의 사회적 계약이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파기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이었습니다.

국가는 석유의 부를 통해 우리의 최소한의 삶을 보장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깨졌다고 느낀
민중의 집단적인 비명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푼토피호 체제가 더 이상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소수 엘리트들의 합의만으로는 국가를 통치할 수 없는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엘리트의 자중지란: 쿠데타와 대통령 탄핵
민중의 분노가 거리에서 폭발했다면 엘리트 내부의 균열은 군대와 의회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1992년 당시에는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육군 중령 휴고 차베스가 이끄는
비밀 군사 조직 MBR-200이 두 차례에 걸쳐 군부 쿠데타를 시도합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지난 수십 년간 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군부가
총구를 돌려 스스로 체제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쿠데타 실패 후 방송에 나와 “우리의 목표는 지금으로서는 실패했다”고 말하는 차베스의 당당한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그를 부패한 정치인들과 다른 새로운 영웅으로 각인시켰습니다.

같은 시기 정치권에서는 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1993년 집권당인 민주행동당(AD)이 야당과 손을 잡고
자신들이 불과 몇 년 전에 선출한 현직 대통령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를 부패 혐의로 탄핵시킨 것입니다.

한때 동지였던 정치인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자신들이 만든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모습은
푼토피호 체제를 지탱해 온 엘리트 간의 합의가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사건이었습니다.

2부: 폭풍 속의 규칙 바꾸기 – 정치 개혁의 치명적 역설

이처럼 총체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베네수엘라 사회에서는 정치 개혁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스템을 구하기 위해 단행된 이 선의의 개혁들은
결과적으로 시스템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1. 주지사의 반란: 지방 분권화라는 양날의 검
가장 중요한 개혁은 1989년에 단행된 지방 분권화 조치,
즉 주지사와 시장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주지사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였고 당연히 중앙당 지도부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이를 직접 선거로 바꾸면 지역 주민들에게 더 책임지는 정치를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학자 마이클 코페지가 지적했듯 이 개혁은 푼토피호 체제의 심장을 겨눈 비수였습니다.
푼토피호 체제의 모든 권력은 수도 카라카스에 있는 소수의 중앙당 지도부에게 극도로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지방 분권화는 바로 이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뿌리부터 뒤흔들었습니다.

이제 주지사와 시장들은 주민들로부터 직접적인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지역의 예산과 행정 조직을 장악한 독립적인 권력자로 부상했습니다.

엔리케 살라스 뢰메르, 안드레스 벨라스케스와 같은 새로운 지역 기반의 정치 스타들이 탄생했고
그들은 기존의 거대 양당에 대항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2. 개인의 부상: 정당이라는 기계의 약화
또 다른 중요한 개혁은 선거 제도의 변경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유권자들이 특정 정당의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제였습니다.

하지만 개혁 이후 유권자들은 정당뿐만 아니라 개인 후보에게도 직접 투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치인의 충성 대상이 카라카스의 당 지도부에서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로 이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당의 규율과 응집력을 급격히 약화시키고 정치 전체를 더욱 파편화시켰습니다.

3부: 죽음의 소용돌이 – 경제와 정치의 상호 파괴

1990년대 베네수엘라는 심각한 경제 위기와 급진적인 정치 개혁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태풍이 동시에 몰아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태풍은 서로의 파괴력을 증폭시키며
국가를 회복 불가능한 죽음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습니다.

추론 1: 파편화의 함정 (The Fragmentation Trap)
경제 위기는 유권자들을 기존의 양당(AD, COPEI)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때마침 단행된 정치 개혁은 이 분노한 유권자들이 기존 정당을 심판하고
새로운 독립 후보나 지역 정당을 선택할 수 있는 완벽한 통로를 제공했습니다.

그 결과는 1993년 대선에서 당선된 라파엘 칼데라 대통령이 얻은 득표율이
고작 30.5%에 불과할 정도의 극심한 정치적 파편화였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수많은 정당과 정치인들이 대립하는 구조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일관된 결정을 내리기에 최악의 환경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끔찍한 악순환을 만들어냈습니다.
경제 위기 → 유권자 분노 → 정치 개혁 → 정치 파편화 → 정책 교착 상태 → 경제 위기 심화.

추론 2: 정책 신뢰도의 증발 (The Evaporation of Credibility)
정치적 혼란은 정책의 품질 자체를 처참하게 떨어뜨렸습니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완전히 증발했다는 점입니다.

경제 주체들은 정부의 정책이 몇 달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극도의 불확실성은 장기 투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경제 주체들은 단기적인 투기와 자본 도피에만 몰두했습니다.
1994년 대규모 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GDP의 10%가 넘는 천문학적인 구제 금융이 투입되었지만
이는 경제를 살리지 못하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불씨만 키웠습니다.

추론 3: 메시아를 갈망하는 정치적 폐허
10년간 이어진 혼돈, 교착, 그리고 부패의 경험은
베네수엘라 국민들 사이에 기존 정치인 전체에 대한 극도의 냉소와 혐오를 낳았습니다.

이 정치적 공백 상태는 이 썩어빠진 판을 모두 불태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약속하는 아웃사이더가 등장하기에 완벽한 조건이었습니다.

국민들은 제도권 정치인들에게 완전히 절망했고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해 줄 강력한 구원자를 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휴고 차베스라는 이름의 군인 출신 포퓰리스트가 역사의 무대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결론: 스스로 무너진 민주주의

결론적으로 1989년부터 1998년까지의 10년은
푼토피호 체제의 길고 고통스러운 사망 과정이었습니다.

경제 위기라는 외부 충격은 시스템의 근본적인 경직성을 폭로했고
선의로 시작된 정치 개혁은 의도치 않게 시스템을 수많은 조각으로 파편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이 정치적 폐허 위에서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절망했고 새로운 구원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다음 8편에서는 이 모든 제도적 붕괴의 결과물이자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었던
차비즈모(Chavismo)의 부상을 분석하겠습니다.

휴고 차베스는 어떻게 이 폐허 위에서 권력을 잡았고
기존의 모든 규칙을 파괴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구축했는지
그리고 그 시스템이 베네수엘라를 어떻게 영원히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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