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몰락 03] – 베네수엘라 금융 붕괴: 돈이 돌지 않는 나라의 최후와 크라우딩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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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편에서 우리는 베네수엘라 경제의 뼈대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뼈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온몸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액 순환계입니다.
경제에서 혈액은 자본이며 순환계는 금융 시스템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할 비극은 뼈대가 부러진 이 거인이 연이어 심장마비까지 겪었다는 끔찍한 사실입니다.
경제의 혈관이 막히고 자본이라는 혈액이 완전히 공급되지 않는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금융은 왜 경제의 ‘심장’인가?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금융 시스템이 왜 중요한지 구체적인 이야기로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네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가구 디자이너 마리아가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녀는 더 넓은 공장과 최신 기계만 있다면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할 꿈이 있습니다.

한편 같은 동네에는 퇴직금을 은행에 넣어둔 은퇴 교사 호세가 있습니다.
이 돈은 금고에서 잠자고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새로운 가치를 만들지 못합니다.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바로 건강한 금융 시스템의 역할입니다.

은행은 호세와 같은 사람들의 저축을 모아 마리아처럼 투자가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중개자입니다.
은행은 수많은 대출 신청자 중에서 마리아처럼 성공 가능성이 높은 좋은 프로젝트를 선별하여
한정된 자본을 집중시키는 경제의 현명한 교통정리 경찰인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융이라는 심장이 건강하게 뛸 때 일어나는 선순환입니다.

만약 이 금융 시스템이 마비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호세의 돈은 금고에서 잠자고 마리아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영원히 실현되지 못합니다.
경제 전체의 성장은 멈추고 잠재력은 그대로 썩어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1980년대 후반 이후 베네수엘라에서 반복된 비극적인 현실이었습니다.

두 번의 심장마비: 베네수엘라 금융 붕괴의 전말

놀랍게도 베네수엘라의 금융 시스템이 처음부터 망가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금융은 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건강해 보였던 심장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멈춰 서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심장마비: 크라우딩 아웃의 비극

1980년대 국제 유가가 하락하면서 베네수엘라 정부의 재정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합니다.
정부는 국채를 발행하며 시장에 상상 이상으로 높은 이자를 약속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은행장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위험을 안고 중소기업에 대출을 해주는 것과
망할 염려 없는 정부에 돈을 빌려주고 안전하게 높은 이자를 받는 것 중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베네수엘라의 모든 은행은 두 번째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라우딩 아웃(Crowding-out, 구축 효과) 현상입니다.
정부의 과도한 자금 수요가 민간 부문으로 흘러가야 할 자본을 모두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여 민간 경제를 질식시키는 현상을 말합니다.

몸 전체가 마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60년대 이래 GDP 대비 75% 수준을 유지하던 민간 대출 비중은 1989년 55% 수준으로 급락했습니다.

두 번째 심장마비: 1994년 은행 위기라는 결정타

첫 번째 발작에서 겨우 회복하는가 싶던 베네수엘라 금융 시스템은
1994년 훨씬 더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심장마비를 맞게 됩니다.
당시 베네수엘라 제2의 은행이었던 반코 라티노의 갑작스러운 파산이 도화선이었습니다.

“내 돈도 안전하지 않다”는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졌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은행으로 달려가 예금을 인출하는 뱅크런(Bank-run)을 시작했습니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대응은 무능하고 우유부단했습니다.
결국 반코 라티노의 파산은 수많은 은행의 연쇄 도미노 붕괴로 이어졌고 베네수엘라 금융의 숨통을 사실상 끊어놓았습니다.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민간 부문에 대한 은행 대출 규모는 GDP의 9% 수준에 불과합니다.
이는 전 세계 최하위권이며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보다도 낮은 충격적인 수치입니다.

혈관이 막힌 경제의 처참한 현실

이러한 금융 붕괴는 베네수엘라 경제의 모든 세포를 질식시키는 광범위하고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1. 사라진 기업가 정신과 성장하지 않는 기업들

금융 붕괴의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기업가 정신의 실종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어도 사업화할 수 없고 성공적인 작은 가게는 더 큰 가게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베네수엘라 기업들은 투자 자금의 60% 이상을 오너 개인의 돈이나 가족 지원에 의존했습니다.
은행 대출 비중은 고작 15.5%에 불과했습니다.

정상적인 경제라면 미래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업이 외부 자금을 유치해 과감하게 투자해야 합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에서는 미래 전망과 상관없이 오직 수중에 현금이 있는 기업만이 투자할 수 있는 기형적인 구조가 고착되었습니다.
이는 곧 혁신의 중단과 생산성 저하로 직결되었습니다.

2. 아시아 금융위기와의 결정적 차이: 위기 대응의 실패

1997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도 살인적인 금융위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과정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한국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부실 은행과 기업을 퇴출시키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금융 시스템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베네수엘라는 위기 이후에도 근본적인 개혁에 실패했습니다.
금융 시스템은 수십 년간 만성 질환 상태로 방치되었습니다.
이는 위기 그 자체보다 위기에 대응하는 국가의 역량과 의지가 장기적인 운명을 가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3. 자원의 저주를 심화시킨 금융 붕괴

건강한 금융 시스템은 자원의 저주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백신 중 하나입니다.
금융은 석유 산업에 편중된 자본을 비석유 부문으로 재분배하여 경제 다각화를 촉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이 마지막 희망의 통로마저 막혀버렸습니다.

결국 베네수엘라는 경제 다각화의 황금 같은 기회를 상실하고
석유 의존이라는 굴레에 더욱 깊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금융 붕괴는 자원의 저주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저주를 영구화하고 심화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론: 심장이 멎은 경제, 그 다음은?

베네수엘라 경제 붕괴의 세 번째 장은 금융 시스템의 완전한 파괴를 목격했습니다.
정부의 재정난이 유발한 크라우딩 아웃에 이어 1994년 은행 위기라는 결정적인 심장마비는 경제의 혈관을 완전히 막아버렸습니다.
그 결과 기업가 정신은 실종되었고 혁신은 멈췄으며 경제 다각화의 길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네수엘라 붕괴의 물리적, 재무적 원인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베네수엘라 붕괴의 노동과 제도 그리고 정치의 총체적 붕괴를 통해
어떻게 한 국가의 사회적 자본마저 완전히 파괴되었는지 그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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