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편의 긴 여정을 통해 우리는 베네수엘라 경제라는 거대한 환자의 내부를 해부했습니다.
뼈대는 부서지고 혈관은 막혔으며 뇌는 고립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환자의 신경계, 즉 경제의 모든 근육과 세포를 움직이게 하는 ‘노동 시장’과 그 규칙들을 들여다볼 차례입니다.
서류상 노동자의 천국이었던 베네수엘라의 노동법은 왜 일자리가 사라진 지옥을 만들었을까요?
이것이 베네수엘라 붕괴의 마지막 퍼즐, 노동 시장 붕괴의 역설입니다.
1부: 보호의 가면을 쓴 족쇄 – 베네수엘라 노동법 해부
베네수엘라의 노동 시장이 어떻게 작동 불능에 빠졌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옥죄었던 법규라는 족쇄의 무게를 알아야 합니다.
선의로 가득했던 이 법들은 실제 기업 현장에서 어떻게 작용했을까요?
1. 살인적인 해고 비용과 ‘LOTTT’의 비수
베네수엘라 노동법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극도로 강력한 고용 안정성 보장이었습니다.
법의 취지는 기업이 함부로 노동자를 해고하지 못하게 하여
노동자들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핵심은 프레스타시오네스 소시알레스(Prestaciones Sociales)라 불리는
복잡한 퇴직금 및 해고 보상금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근속 연수가 늘어날수록 기업이 지불해야 할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였습니다.
심지어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퇴사할 때조차 기업은 상당한 액수의 퇴직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결정타는 2012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단행한
노동자·근로자를 위한 조직법(Ley Orgánica del Trabajo, los Trabajadores y las Trabajadoras, 이하 LOTTT)이었습니다.
이 법은 기존의 해고 보상금 제도를 소급 적용하는 초유의 조항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는 기업들에게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잠재 부채를 안기는 회계상의 재앙이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자 리카르도 하우스만(Ricardo Hausmann)은
이 제도가 노동 시장에 엄청난 경직성을 초래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직원을 한 명 해고하는 것은 수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위자료를 지불해야 하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2. 경제 논리 없는 최저임금과 등대 효과의 함정
베네수엘라의 최저임금은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정부는 대중의 인기를 얻거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거의 매년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최저임금 인상이 만들어낸 등대 효과(Efecto Faro)였습니다.
공식 부문의 최저임금이 사회 전체 임금 수준의 기준점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너무 높은 기준점으로 인해 저숙련 노동자들이 공식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여기에 정부는 법으로 강제하는 각종 수당(Bonus)을 끊임없이 만들어냈습니다.
식비, 교통비, 보육 수당 등 월급 외에 기업이 추가로 지급해야 할 현금성 복지가 계속 늘어났습니다.
직원 수가 20명이 넘는 기업에만 특정 수당이 의무 적용되는 경우는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명백한 신호였습니다.
3. 예측 불가능한 세금 폭탄, 급여세
이 모든 비용 위에 기업은 사회보장세, 주택기금, 실업보험 등
복잡한 급여세를 추가로 부담해야 했습니다.
이 세금들 역시 제도의 잦은 변경과 예측 불가능한 과세 표준 때문에
기업들에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베네수엘라의 기업들은 직원을 한 명 채용할 때마다
월급이라는 눈에 보이는 비용 외에 퇴직금, 각종 수당, 세금이라는
보이지 않는 비용의 거대한 빙산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2부: 피할 수 없었던 파괴 – 어떻게 보호가 붕괴로 이어졌나?
이처럼 노동자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던 황금 새장은
실제 경제 현장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는 노동자 보호가 아닌
일자리 자체의 파괴와 경제의 총체적 비효율이었습니다.
1.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 분열된 노동 시장의 탄생
이 강력한 노동법은 모든 노동자를 평등하게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네수엘라 사회를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계급으로 분열시키는
이중 노동 시장(Two-Tier Labor Market)을 공고히 했습니다.
인사이더(Insiders)는 소수의 운 좋은 노동자들입니다.
주로 국영기업이나 안정적인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고용된 이들은
법이 보장하는 모든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황금 새장 안에 안락하게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새장 밖의 대다수 노동자들은 이 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Outsiders)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실업자가 되거나
더 흔하게는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비공식 경제(Informal Economy)로 내몰렸습니다.
세계은행(World Bank)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40%대였던
베네수엘라의 비공식 경제 부문 종사자 비율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50%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2. 성장을 포기한 기업들 – 중소기업 말살 정책
건강한 경제에서 일자리의 대부분은 새롭게 생겨나고 성장하는
중소기업(SME)에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노동법은 이 중소기업들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직원 20명의 함정은 중소기업 사장들에게
절대 사업을 확장하지 말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냈습니다.
성장의 과실보다 규제의 비용이 훨씬 더 커지는 기괴한 구조 속에서
기업들은 성장을 포기하고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3. 고용 공포증 – 아무도 직원을 뽑지 않는 나라
살인적인 해고 비용은 또 다른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바로 고용 공포증(Fear of Hiring)입니다.
기업 입장에서 한번 해고하려면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직원을
새로 뽑는 것은 엄청난 리스크였습니다.
경기가 좋아져도 기업들은 선뜻 정규직 직원을 새로 뽑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기존 직원들에게 비싼 초과 근무 수당을 주거나
임시 계약직을 쓰거나 아예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리카르도 하우스만의 연구는 1990년대 베네수엘라 제조업의 고용 탄력성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였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3부: 노동 시장 붕괴가 초래한 더 큰 비극
망가진 노동 시장은 단순히 일자리를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1. 불평등의 진짜 원인: 추락하는 노동 소득 분배율
베네수엘라 국민 소득에서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임금의 총 비중
즉 노동 소득 분배율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습니다.
노동법이 노동자를 아무리 강력하게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경제 전체의 파이에서 노동 계층이 가져가는 조각의 크기 자체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인프라와 금융의 붕괴로 새로운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자
경제 전체에서 자본은 점점 더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반면 일자리는 줄어들고 일하려는 사람은 넘쳐나니
노동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빈곤의 급증: 추락하는 경제에 불평등의 기름을 붓다
이러한 총체적 난국 속에서 빈곤층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베네수엘라의 권위 있는 생활 수준 조사인 ENCOVI에 따르면
2014년 48%였던 소득 기준 빈곤율은
불과 수년 만에 90%를 넘어서는 비현실적인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1980년대의 1차 빈곤 급증은 주로 경제 전체가 축소되면서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의 2차 빈곤 급증은 경제 축소와 더불어 불평등 심화가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평등을 심화시킨 주범 중 하나가 바로
사회를 보호받는 인사이더와 버려진 아웃사이더로 분열시킨 망가진 노동 시장이었습니다.
결론: 황금 새장은 어떻게 철의 관이 되었나
선의는 때로 최악의 결과를 낳습니다.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숭고한 이상에서 출발한 베네수엘라의 노동법은
그 의도와는 정반대로 일자리를 파괴하고 경제를 마비시키며
사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동했습니다.
기업가들은 고용을 포기했고 중소기업은 성장을 멈췄으며
청년들은 공식적인 일자리를 찾을 희망을 잃었습니다.
소수의 노동자를 가두어 보호하려던 황금 새장은
결국 경제 전체를 질식시키는 철의 관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음 6편에서는 이 모든 비극을 방치하고 심지어 조장하기까지 한
베네수엘라 정치 및 제도의 붕괴 과정을 통해
어떻게 한 국가의 리더십과 사회적 신뢰마저 완전히 파괴되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겠습니다.
- [베네수엘라의 몰락 01] – 자원의 저주 : 남미 최고 부자에서 최빈국으로
- [베네수엘라의 몰락 02] – 베네수엘라 망가진 인프라: 도로, 전기, 수도 – 나라를 무너뜨린 가장 쉬운 방법
- [베네수엘라의 몰락 03] – 베네수엘라 금융 붕괴: 돈이 돌지 않는 나라의 최후와 크라우딩 아웃
- [베네수엘라의 몰락 04] – 교육의 역설: 모두가 대학 갔는데 왜 나라는 망했나?
- [베네수엘라의 몰락 05] – 노동법이 어떻게 경제를 파괴하는가: 선한 의도의 역설
- [베네수엘라의 몰락 06] – 배제된 자들의 분노가 어떻게 체제를 무너뜨렸나 :포퓰리스트 탄생 배경
- [베네수엘라의 몰락 07] – 카라카소 사태로 본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붕괴의 서막
- [베네수엘라의 몰락 08] – 우고 차베스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 좌파와 군부의 동맹
- [베네수엘라의 몰락 09] – 베네수엘라 경제 몰락의 시작: 가격 통제와 외환 통제 정책
- [베네수엘라의 몰락 10] – 베네수엘라 포퓰리즘의 심리학: 차베스 등장의 시대적 배경
- [베네수엘라의 몰락 11] – 한 국가가 무너지는 과정: 베네수엘라의 총체적 시스템 붕괴
- [베네수엘라의 몰락 12] – 베네수엘라 석유 국유화 정책이 실패로 끝난 과정 분석
- [베네수엘라의 몰락 13] – 베네수엘라 재정 정책 실패: 호황기에 불황을 대비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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